나. 천주교 및 개신교당
다음 널리 건립된 또 하나의 양식건축들은 종교계통의 건물들이다.
1890년의 명동주교관, 1892년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1891∼1892년의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 1892∼1898년의 명동성당 등이다. 이들은 대개 고딕양식에 준한 것으로 벽돌쌓기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전담하다시피 한 것이 하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龍山神學校(사적 255호)512)는 프랑스신부 코스트(Eugence Jan, George Coste)의 설계로 1891년(고종 18) 5월 6일에 정초식을 올리고, 1892년 6월 祝聖式을 가졌다. 이 건물은 반지하 1층, 지상 2층의 한국 최초의 신학교 건물로서 중앙에 현관과 지하층 출입구롤 두고 좌우에 1층 현관에 이르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는 전면에 편복도를 두고 안쪽으로 방들을 배치하여 모든 방에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고 평면 중앙과 평면 좌우의 끝단에는 계단실을 두었다. 정면은 중앙 현관부를 중심으로 좌우 3칸씩, 벽돌을 쌓아 붙임기둥(Pilaster)를 만들어 모두 7칸으로 구획하고 각 칸에는 세그멘탈아치(Segmental arch)의 창문을 두 붙임기둥 사이 모두에 설치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네 곳에 도머(Domer)를 두었다.
藥峴聖堂(사적 252호)513)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처음 1890년 순화동에 강당을 짓고 포교하다가 정가밀로신부가 책임자로 부임하여 약현 언덕의 金君善 소유의 대지를 사서 1891년 10월27일 정초하고 1892년 9월 준공을 보았다. 설계자는 당시 부주교이던 프랑스신부 코스트로서 중국인 기술자들이 시공하였다. 평면은 중앙에 본랑(Nave)을 두고 좌우에 본랑 폭의 1/2폭 되는 측랑(Aisle)을 두었고, 중앙으로 남녀 구별지어 앉도록 칸막이가 있었는데 1921년 교세의 상승과 더불어 본당신부 우신부가 칸막이를 철거하고 둔중하던 내부의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제단 뒤 후진(Apse)은 사각으로 꺾여져 있고 내부는 반원이다.
입면은 정면 중앙에 뾰족아치(Pointed Arch)의 현관문을 두고, 이의 좌우에 반원아치의 창문을 두었으며, 중앙 높직이 뾰족한 지붕을 가진 높이 22m의 종탑을 두었다. 이 종탑은 1905년에 새로 세운 것으로 종탑의 지붕에는 사면에 루까느(Lucarne)를 설치하였고, 그 아래 종탑 탑신 즉 종탑의 몸체에는 뾰족아치의 창을 쌍으로 두었다. 현관 바로 위에는 둥근 원화창이 있다.
측면은 후랫버트레스들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에 반원아치의 창들을 하나씩 같은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좌우 측면의 중앙위치에 부현관을 하나씩 두었다. 천장은 본랑에서는 뾰족 배럴볼트(Pointed barrel vault)이고, 측랑에서는 반원형 배럴볼트로 리브볼트이다. 지붕은 함석으로 마감하였다.
현재 중림동성당이라 불리고 있는 이 성당 근처의 焰焇橋(蓬萊橋) 언저리는 중국에 들어가 최초로 영세를 받은 李承薰의 집이 있었고, 1801년(순조 1), 1839년(현종 5), 1866년(고종 3) 등 이른바 신유·기해·병인년의 천주교수난 때 44인의 순교자가 이 곳과 가까운 서소문 밖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 터를 구입하여 성당을 세운 것이라 한다.
명동성당은(사적 258호)514)은 건평 454평, 평면 길이 69m, 폭 28m, 높이 23m, 첨탑 높이 45m의 벽돌조적조의 건물이다. 약현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코스트신부가 설계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건립되었다.
본래 이 성당이 선 자리는 교회당 창설 때 교회당으로 삼았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서 블랑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매수하였었다. 그 후 1887년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이 곳 종현 언덕을 평평하게 고르고, 1892년 8월 5일 정초식을 갖고, 1894년 공사를 착공하였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이 좋지 않아 중국인 벽돌공, 미장공들을 데려와 공사를 진행시켰다. 1896년에 벽체공사가 대체적으로 끝나고 聖祝式을 올린 것은 1896년 5월 29일이었다.
평면은 라틴십자형 三廊式으로 평면 중앙에 본랑을 두고, 좌우에 측랑을 두었는데, 양 트란셉트(Transcept)의 돌출부는 한 스판 정도로 본격적인 라틴십자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쌓아 중후한 맛이 나는데 20여 종의 다른 모양 벽돌을 만들어 세부설계에 부응하도록 하였다. 또 필요한 곳에는 회색 벽돌을 사용하였다. 정면 출입구, 각 창의 형태는 뾰족아치(Pointed Arch)를 사용, 고딕양식을 이루고 대첨탑은 본당 높이보다 비례상으로 낮아 보이나, 주변에는 소첨탑들로 장식하였다.
종탑의 좌우측, 본랑과 측랑의 경계지점에는 다각형 평면의 소탑(Turret)들이 서 있다. 버트레스(Buttress)는 등간격으로 세웠으나,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가 없어, 고딕양식의 진면목을 많이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내부 마감은 코스트신부의 별세로 위돌박(Victor Poisnel)신부가 맡아 마무리하였다. 제대부와 신자석 사이에는 영성체 난간(Communion Rail)이 있는데, 초기 성당인 대구 桂山성당의 것과 함께 현존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러나 이 성당의 것은 본래 금속이었으나 2차대전 때 일본인들이 강탈하여 나무로 만든 것이 전하고 있다.
천장은 리브볼트(Ribbed Vault)이고, 기둥에는 주 피어(Main Pier), 부 피어(Minor Pier) 등이 모여 하나의 족주(簇柱, Clustered Pier)를 이루고 있다. 후진(Apse)은 각으로 꺾여 있고, 제대 뒤로 張勃이 12宗徒를 사실적으로 그린 벽화가 있다.
1899년 착공하여 1902년에 완공을 본 원효로성당은 같은 장소에 있는 용산신학교를 설계하였던 코스트신부의 설계로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착공과 준공연대, 金大建의 이니셜 A-K(Andre Kim) 및 그의 생존연대(1821∼1846)가 기록되어 있고, 1942년까지 그의 유해도 안치되어 있었다.
성당은 언덕을 이용하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남측 언덕 아래쪽은 3층이고 수녀원쪽은 2층이 된다. 성당의 출입은 정면(남측) 서쪽의 측면 입구로, 한편은 북쪽 제대 앞의 동쪽 입구로 할 수 있다. 평면은 정면 2柱間에 종탑부 1칸이 서측으로 붙어 있고, 측면은 5주간에 5각으로 둥그스름하게 꺾여진 후진이 붙어 있다. 각 기둥에는 후랫버트레스(Flat Buttress)가 붙어 있다.
내부는 본랑과 측랑의 구분없이 본랑만으로 이루어졌고, 천장은 포인티드 배럴볼트(Pointed barrel vault)이다. 창문은 뾰족아치 창으로 후랫버트레스와 함께 고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후면에는 원형장식 쌓기로 장식한 난간을 두른 블라인드 갤러리(Blind gallery)를 두었는데 3개의 반원아치가 받치고 있다.
한편 1886년의 배재학당 강당, 1895∼1898년의 정동교회, 1896∼1900년의 이화학당 교사 등이 개신교계통의 건축물로 건립되어 근대건축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貞洞敎會(사적 256호)515)는 건평 175평, 연건평 364평의 단층 벽돌조적조 건물이다. 이 교회당건물은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의 교회당 건물로서 1895년 착공하여 1896년 12월26일 獻堂式을 베푼 바 있다. 본래는 115평 규모였으나 1926년 증축하여 60평이 증가, 총건평 175평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평면과 입면을 이루게 되었다.
평면은 본래 라틴십자형(Latin cross)으로 본랑과 제단의 트란셉트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후 증축을 하면서 본랑 양측에 측랑을 첨가하여 이 부분이 트란셉트와 붙게 됨으로서 라틴십자형의 평면에서 장방형 평면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후진이 돌출되고 또 종탑부가 정면 동남측 모서리에 자리잡음으로써 교회당 평면의 모습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다.
입면은 벽돌쌓기로서 큰 벽체를 구성하고 곳곳에 뾰족아치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석조기단으로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기단에서의 솜씨가 배어 있어 주목되고 있다. 지붕은 함석판이었으나 최근 보수공사 때 동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