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第二次 倭亂(丁酉)과 李舜臣 最後活躍
앞서 沈惟敬의 提唱한 和議에 對하여 朝鮮側에서는 대개 反對의 意思를 表하였으나 明나라 朝廷에서는 이를 支持하여 이후 二 三年간 交涉의 使節이 가고 오고 하더니 明으로부터 秀吉을 日本國王에 封한다는 國書가 傳達되매 秀吉은 비로소 惟敬의 術策에 속은 것을 깨닫고 드디어 再入寇를 決行하였다. 【再入寇】 즉 秀吉은 宣祖 三十年 丁酉에 다시 小西行長 加藤淸正으로 하여금 十四萬軍을 이끌고 朝鮮에 쳐 들어와 앞서 南海岸에 쌓던 諸 舊壘에 웅거하였다. 그리하여 倭軍은 北으로 稷山(忠淸道) 西으로 南原(全羅道)에까지 침범하였는데, 明의 援軍이 또 와서 我軍과 협력하여 敵을 막아 南으로 쫓았다.
【李舜臣의 罷免과 再起用】 그러나 이때 倭의 水軍은 자못 활발한 行動을 取하였으니 그것은 李舜臣 장군이 敵의 反間과 그를 미워하는 자의 참소(讒訴)로 因하여 그간 統制使의 자리를 罷免당하고 (뿐만 아니라 거이 極刑에 處할뻔하다가 一等을 減하였고) 그를 시기하던 元均이 대신 統制使가 되어 敵의 꾀임에 빠져 싸움에 大敗하였던 까닭이다.
朝廷에서는 이에 李舜臣을 다시 이르켜 統制使를 삼으니 舜臣은 元均 敗戰 後의 惡條件을 무릅쓰고 간신히 남은 戰艦과 散卒을 걷우어 西海로 通하려는 敵의 大軍을 【鳴梁大捷】 鳴梁 海上(珍島)에서 마지하여 거의 여지없이 쳐 부시어 敵의 氣勢를 크게 꺾었고 또 明의 水軍提督 陳璘(린)과 聯合하여 敵을 古今島(康津南)에서 大破하였다.
陸戰에 있어서도 明의 援軍이 官軍으로 더부러 南方 到處에서 敵과 交戰하는 동안에 敵軍側에는 큰 變動이 생기었다. 그것은 戊戌八月에 倭亂의 張本人인 秀吉이 病들어 죽으매 遺命으로 군사를 撤退케 한 事實이었다. 이로 因하여 倭軍이 차례로 물러갈새 舜臣은 이 틈을 타서 撤退하는 倭軍을 섬멸하려하여 露梁(南海島와 河東間) 海上에서 敵의 大部隊와 어울려 싸우다가 不幸히도 敵의 流彈에 맞아 壯烈한 最後를 마치었다. 때는 戊戊 十一月 十九日이니 舜臣의 나이 五十四歲이었다.
舜臣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싸워 적은 兵力으로 능히 敵의 大軍을 여러 번 쳐 깨트렸으니, 오직 나라를 위하는 그 지극한 정성 崇高한 人格, 偉大한 統率 指揮力 또 그 神妙한 戰略은 모두 世界 海戰史上에 類例가 드문 것이다. 이 싸움에 倭의 水軍은 드디어 敗하여 돌아가고 그 陸軍도 죄다 撤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