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中期(國紀 3901年-4057年 宣祖元年-景宗末年)第五章 새 施設과 새 文化의 싹틈

三. 學風의 變遷

在來의 朝鮮 學者의 學問이란 것은 中國의 經學·文學 ─ 特히 朱子學에만 치우쳐 오래동안 그 弊를 벗지 못하더니 倭亂 胡亂을 격고 또 外來 文物의 刺戟을 받은 후로는 비로소 自我에 눈뜨기 시작하여 【自我의 反省과 批判】 우리의 過去가 너무도 虛無하고 缺陷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空理空談의 죽은 學問보다 實際에 利로는 산 學問 ─ 즉 利用厚生의 學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과 우리의 固有한 文學과 歷史도 硏究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차차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에 學風의 一變을 보게 되었다.

【李晬光】 위에 말한 李晬光(芝峯)은 일즉이 中國에 奉使한 일도 있고 또 그 學問의 視野가 넓고 매양 實地에 立脚하여 觀察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던 만큼 在來의 孤陋偏狹한 類의 學者와는 확실히 異彩가 있던 이니 學風變遷의 最先進이라 할 만하였다. 【韓百謙】 이와 때를 같이한 韓百謙(久庵)은 그 視野가 李晬光처럼 넓지는 못하나 東國의 歷史 地志에 就하여 多少 考證學的 方法을 取하여 이 方面硏究의 最先鞭을 着한 이었다.

【金堉】 위에 말한 金堉도 實學派의 一人으로 종종의 有益한 提議와 實施를 行하였고, 【柳馨遠】 그보다 後輩인 柳馨遠(磻溪)이란 學者는 孝宗·顯宗 때 사람으로 한平生 草野에 파무쳐 實用의 學을 主로 硏究하여 많은 著書를 남기고 여러 가지 時弊와 改良策을 말하였다. 【朴世堂】 이와 同時인 朴世堂(西溪)은 大將히 朱子의 說을 批判하고 自家의 見解를 세워 이 때문에 斯文亂賊이란 소리까지 들은 이지만 그는 역시 實學을 主로 하여 農書의 一種인 穡經을 著述하여 後世에 남겨주었다.

【李瀷과 그 學派】 柳馨遠의 學을 祖述하여 經濟實用의 學을 主로 하면서 博學多彩한 學風을 일으킨 이는 李瀷(星湖)이니 이도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고 林下에 있어 學問에만 專力하여 經史 諸子의 書로부터 天文 地理 律算 醫藥에 이르기까지 硏究하고 特히 西洋 學述의 精密함을 매양 탄복하였다.

李瀷이 이러한 學風을 일으키매 그 一門과 弟子들도 역시 그의 學을 繼承하여 一層의 發展을 일우었으니 그 一門 中에서는 李用休(惠寰) 李家煥(貞軒)의 父子와 李福休 李重煥 같은 이가 나오고 그의 弟子 中에서는 尹東奎(邵南) 安鼎福(順庵) 愼後聃(河濱) 같은 碩學이 나왔다. 이들은 다 畿下의 南人學者로 그 姻戚間에도 그러한 學風이 퍼져 우수한 學者들이 많이 쏘다져 나왔다. 安鼎福은 特히 史學에 硏究가 기퍼 東史綱目 列朝通紀 등의 史書를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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