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後期(國紀 4058年-4243年 英祖元年-純宗末)第六章 日本과의 交涉과 開化運動

二. 日本과의 修好

大院君을 몰아낸 閔氏 一派는 外交方針에 있어 처음부터 鎖國主義를 打破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世界의 大勢上 스스로 開國策을 쓰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오래동안 國交斷切 中에 있던 日本政府와 서로 修好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 앞서 日本은 維新政府가 서서 歐美諸國과 通商을 트며 조선과도 修好하기를 여러 번 원하여 왔으나 大院君은 日本의 方式이 前日과 달으다 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日本서는 征韓侖을 主張하는 一派도 생기더니 【日艦侵入】 高宗 十二年(國紀 4203 西紀 1875)에 日本軍艦 震揚號가 江華島 附近에 이르러 短艇으로 漢江에 들어오려 할새 江華島의 守兵이 이에 發砲하여 한 때 衝突이 생기었다. 그 이듬해(十三年 丙子) 日本은 黑田淸隆을 全權大臣, 井上馨을 副使로 삼아 조선에 보내어 靈揚號 砲擊事件을 힐날(詰難)하고 이를 機會로 修好條約을 맺으려 하거늘 【丙子條約】 처음에는 서로 意見이 잘 맞지 않더니 右議政 朴珪壽와 譯官 吳慶錫 等이 世界大勢로 보아 修交가 마땅하다 하매 王과 閔妃도 그리 여기여 드디어 江華島에서 두 나라의 修好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를 丙子條約 혹은 江華島條約이라 하니 그 內容은 열 두 조목으로 되었고 그중에 주요한 것은 朝鮮이 自主獨立國이라는 것과 두 나라의 使節을 交換한다는 것과 釜山 外에 港口(仁川·元山)을 열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修信使往來】 그리하여 우리政府는 이해(丙子)에 金綺秀를 修信使로 삼아 日本에 보내고 그후 四年인 庚辰(十七年)에 또 金宏集(後名 弘集)을 보내어 修好의 禮를 보이었으나 【日公使館設置】 그 동안 日本서도 數次(十四·十六年) 花房議質을 代理公使로 京城에 보내어 十六年 己卯에는 西大門 밖 淸水舘(今 天然亭)을 假公使舘으로 하여 머물게 하고 釜山을 비롯하여 이후 元山 仁川의 諸港을 차례로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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