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韓日協約과 義兵
【第二次韓日協約】 戰後의 日本은 더욱 侵略의 거문 손을 내밀어 韓國에 있어서의 모든 權利를 뺏는 첫 일로 먼저 重要한 外交權을 걷우려 하여 光武 九年 十一月에 伊藤博文이 건너와 第二次의 協約案을 제출하니 처음에는 쉽사리 허락치 아니하였으나 그의 要求가 여러 차례 거듭하는 동안에 同月 十七日에 이르러 마침내 協約이 成立 調印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第二次 韓日協約으로 乙巳條約 或은 保護修約이라 하는 것이니 그 內容은 韓國 外交權의 接收, 日本統監의 駐在, 韓國皇室의 安寧維持의 保證 따위였다.
【國民激憤】 이 協約이 發表되자 民心은 크게 騷動되어 愛國的 演說會가 끊이지 않고 義憤에 불탄 나머지 侍從武官長 閔泳煥 같은 이는 國民에는 告하는 遺書를 남기고 自殺하였으며 其外 特進官 趙秉世 以下 京鄕 各地에서 원통함을 못 이겨 自決하는 이가 많았다.
【參考】忠正公 閔泳煥 遺書(原文 漢文)
-同胞에게 告함-
아, 우리 나라 우리 民族의 恥辱이 이 지경에까지 다달았고나. 生存競爭이 甚한 이 세상에 우리 民族의 運命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原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서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泳煥은 한죽엄으로 써 皇恩을 갚고 우리 二千萬 同胞에게 謝하려 한다. 泳煥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黃泉에서 여러분을 돕고저 한다. 바라건대 우리 同胞兄弟여! 千萬倍나 奮勵를 더하여 志氣를 굳게 갖고 學問에 힘쓰며 맘과 맘을 合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의 自由獨立을 회복 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地下에서 기꺼히 웃겠다. 아! 조금이라도 失望하지 말라. 大韓帝國 二千萬 同胞에게 마즈막으로 告한다.
【統監府設置】 이리하여 그 해 十二月 二十日에 日本은 서울에 統監府를 두고 長谷川好道가 臨時代理로 있더니 이듬해 三月에 伊藤博文이 첫 統監으로 왔다.
【義兵】 이와 前後하여 民族的 義憤은 불꽃과 같이 치밀어 國內 여러 곳에서 義兵을 일으키어 日本人에 對한 反抗運動을 開始한 義士가 많았으니 그 中 閔宗植 崔益鉉 申乭石 等은 가장 著名한 이로 서로 呼應하여 한 때 놀라운 氣勢를 보이었으나 후에 形勢 不利하게 되어 모두 잡히어 拘禁 혹은 귀양과 죽엄을 당하였다.
【一進會】 앞서 日本의 勢力이 커지매 이에 흡쓸여 들어가 私利를 채우려는 賣國奴도 있어 宋秉畯 尹始炳 같은 자는 維新會라는 것을 만들고 東學敎徒의 一人인 李容九를 달래어 그의 進步會와 합하여 一進會라 이름짓고 日本의 走句노릇을 하였는데 그들은 이 保護條約 체결 전부터 이미 韓國은 日本의 保護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發表하기까지 하였다. 【天道敎】 一進會가 이와 같은 意見을 發表하자 日本에 가 있던 東學 首領 孫秉熙는 곧 서울로 돌아와 李容九와 손을 끓고 天道敎를 일으키니 이로부터 東學正統은 天道敎라는 이름으로 發展하고 李容九는 따로 侍天敎를 일으키어 前者와 對立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