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 기획 | 자료해설 | 시나리오 | 특수편집 | 구축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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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 | 류주희 | 이정란 | 양윤경 | 리더스 미디어 센터 | 2013 |
난중일기 | 정성희 | 안지은 | |||
서유견문 | 김윤희 | ||||
경국대전 | 윤덕영 김성희 이규리 구영옥 |
김윤주 | 유영수 | (주)블루디씨 | 2014 |
북학의 | 김창수 | ||||
한국통사 | 김윤희 | ||||
왕오천축국전 | 윤덕영 이규리 구영옥 |
임혜경 | 송미숙 | (주)블루디씨 | 2015 |
삼강행실도 | 이광렬 | ||||
택리지 | 김현정 | 유영수 | |||
매천야록 | 서동일 | 송미숙 | |||
조선상고사 | 박준형 | ||||
열하일기 | 신재호 이주호 |
손성욱 | 이나경 | 스토리라인 | 2024 |
조선책략과 만국공법 | 한승훈 | ||||
조선말 큰사전 | 한용운 |
인조 15년,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은 19세기말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단을 보냈습니다. 250여 년에 걸친 활발한 교류의 결과, 수많은 청나라 견문록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수백 종이 훨씬 넘는 연행록 중에서도 출판도 되기 전에 입소문을 타고 크게 유행한 책이 있습니다.
조선 사신단 최초로 북경을 지나 ‘열하’까지 다녀온 연행록, 바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입니다.
열하일기- ‘열하’를 찾아서
열하,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의 옛 이름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장인 ‘피서산장’이 있던 곳입니다. 청 황제 건륭제는 여름이 되면 이곳 열하에 머물렀습니다. 70세 생일잔치도 ‘열하’에서 열기로 했는데요. 정조는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정기적 사행 외에 특별 사신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미 중년의 나이였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한 박지원은 사신단의 정사인 친척 형을 수행하는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따라가게 되는데요.
1780년 초여름, 약 300명의 조선 사신단이 북경을 향해 출발합니다. 6월 24일, 마침내 국경을 넘어 청나라의 입구 ‘책문’에 도착한 박지원의 심경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책문은 중국의 동쪽 끝 벽지인데도 오히려 이 만한데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였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 같이 후끈한 느낌이 들었다.”
- 《열하일기》「도강록」 중
국경의 작은 마을에 불과한 ‘책문’조차 크게 번성한 것에 울분을 느끼다가, 이내 이러한 반응이 질투였음을 반성하고는 하인 장복에게 묻습니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상공업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이 중화를 계승한 ‘소중화’라고 여긴 탓에, 청의 선진 문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배격하던 시대였습니다.
“때때로 마주하는 오랑캐 아이 개돼지와 같고, 호부에서 보내온 소반의 과일은 누린내가 나네.”
- 《도곡집》 1721년 북경 회동관에 머물던 사신 이의현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양반 지식인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갖고 있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직접 목격한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실용적인 시각을 가지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부국강병을 이룰 것을 주장합니다.
박지원이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를 따르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려면, 먼저 현실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글을 기록하는 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박지원이다. 기록하는 때는 언제인가? 건륭 45년 가을 8월 초하루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 중
박지원은 이를 위해 ‘열하일기’에서 청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18세기 대부분의 조선 문인들이 사적 기록에서 명나라의 연호를 쓰던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박지원은 깨진 기와 조각으로 담을 쌓고 똥거름으로 거름을 만드는 모습이 청나라의 장관이라 말합니다.
일등 선비는 이렇게 말한다.
“개돼지에게 무슨 볼만한 것을 찾을 것인가”
나는 삼류 선비이다.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었고, 정말 장관은 냄새 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 《열하일기》「일신수필」 중
하찮은 물건을 버리지 않고 생활에 활용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이용후생의 정신이 바로 열하일기를 관통하는 주제였던 겁니다.
“... 좁은 강토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한마디로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중
이처럼 민생을 먼저 고려하는 박지원의 생각은 열하일기의 곳곳에 드러납니다.
8월 5일. 한여름 무더위를 뚫고 겨우 북경에 도착했지만, 그곳에 황제는 없었습니다. 사신단은 황제의 생일잔치가 열하에서 열린다는 것을 북경에 와서야 알게됩니다.
황제의 생일잔치는 나흘 후, 사신단의 힘겨운 강행군이 시작됐습니다. 나흘 밤낮을 지새우고 하루에 아홉 번 강을 건너 마침내 도착한 열하.
그런데, 박지원이 열하에서 본 건 단지 황제의 여름 별장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정수리이다. 황제가 북쪽으로 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정수리를 눌러 몽고의 목줄을 틀어잡기 위해서이다.”
- 《열하일기》 「황교문답」 중
박지원은 북경을 중심에 두고 동쪽에 조선, 남쪽에 한족, 북쪽에 몽고, 서쪽에 티베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북쪽 초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열하임을 깨닫습니다.
“이름은 비록 피서라 했지만 실은 천자 자신이 오랑캐를 방어하고 있는 셈이다.”
- 《열하일기》 「황교문답」 중
이렇게 열하에서의 경험을 통해 박지원은 중국 본토와 만주를 넘어 티베트나 몽골을 아우르는 청의 통치술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열하일기는 조선과 중국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에 근거한 이용후생의 정신을 담고 있었기에 ‘소중화’라는 생각에 갇혀있던 당대 독자들의 시각까지 넓혀주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열하일기는 그 문체와 내용 때문에 금서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필사본이 유행할 정도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나라를 멸시할 때 청나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우리 삶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책,
편견을 깨고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된 책,
박지원의 《열하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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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 손성욱
시나리오·구성 : 이나경
검수 : 김창수, 명재림, 서명원
촬영 : 윤종원
종합편집 : 박인준, 이승신
삽화 : 김종석, 심희영
녹음·음악 : 조동효
로고 : 민승욱
촬영, 자료 협조 :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PM : 윤종원,김기원
행정 : 김상희
연출 : 윤종원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연행록으로 저자는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이자 삼종형인 박명원을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수행하여 청나라를 다녀왔다. 당시 견문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집필했다. 그가 집필할 때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필사되어 널리 퍼졌고, 편역한 한글본이 나오기도 했다. 1832년(순조 32) 사행을 다녀온 김경선은 “연경에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행문을 남겼다. 그중 3명이 가장 유명하니, 그는 곧 노가재 김창업,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이라고 평한 바 있다.
명·청 시대 중국에 사행을 다녀온 조선인이 남긴 연행록만 수백 종이다. 이중 제목에 ‘열하’가 들어간 경우는 손에 꼽히며 《열하일기》가 최초이다. 조선은 매년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단을 보냈고, 특별한 임무가 있을 때 별사를 파견했다. 사신단은 정해진 조공로를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황제가 있는 베이징이었으며, 열하는 조공로 밖에 있었다. 박지원이 동행한 진하 겸 사은사는 열하를 방문한 첫 조선 사신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부가 사무를 관할하는 조공국 사신단 중 최초였다. 박지원이 쓴 초기 형태의 여행기 명칭은 ‘연행음청’이었으나, 정리 과정에서 《열하일기》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도 열하라는 공간의 특별함을 드러낸 것이다.
열하는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의 옛 이름이다. 이곳에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장인 피서산장이 있다. 건륭제는 여름이 되면 열하에 머물렀으며, 칠순이 된 1780년에는 고희연을 베이징이 아닌 열하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박지원이 참여한 진하 겸 사은사는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한 사행이었다. 조선은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를 파견했지만, 생일에 맞춰 보내지 않았다. 연말에 동지, 정조, 성절을 하나로 묶어 정기 사행으로 보냈다. 황제의 생일을 경축하는 것은 의례적 행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례 없이 진하사를 파견했다. 진하사는 황제 등극과 같이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을 때 파견하는 사신이었다. 이번 사신단은 전례에 없었고, 건륭제로부터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었다. 파견이 촉박하게 결정되어 고희연이 열하에서 열리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출발했다. 건륭제는 예상치 못한 조선의 축하에 기뻐했으며 진하사를 고희연에 참석하도록 했다. 이에 박지원은 열하로 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다.
박지원의 전례없던 경험만큼 《열하일기》도 특별하다. 표제는 일기라고 되어 있지만, 김경선은 《열하일기》를 “전기체(傳記体)와 같은데 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해박하다”고 평했다. 박지원은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그의 다양한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탐색하듯, 『열하일기』는 시간에 따른 일기 형식을 근간으로 하면서, 특정 주제를 다루는 잡록을 함께 엮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열하일기》는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도강록(渡江錄), 성경잡지(盛京雜識), 일신수필(馹汛隨筆), 관내정사(關內程史)로 나누어 정리했으며, 베이징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여기에 주제별 항목인 망양록(忘羊錄), 심세편(審勢篇), 혹정필담(鵠汀筆談),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 피서록(避暑錄), 동란섭필(銅蘭涉筆), 옥갑야화(玉匣夜話), 금료소초(金蓼小抄), 환희기(幻戲記), 행재잡록(行在雜錄), 산장잡기(山莊雜記),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등의 글을 수록했다.
『열하일기』의 저술은 사행 도중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박지원은 건륭제의 고희연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무더위와 폭우 속 강행군을 하며 눈, 귀, 코 혀, 피부 오감이 모두 피로한 상태에서 일지를 정리하고, 단상과 견문을 기록하였으며,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베꼈다. 귀국 후 사행 기록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열하일기》를 탈고하였다. 이는 박지원이 청나라 사행에 참여한 목적이 분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지원은 자신보다 먼저 청나라에 다녀온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의 영향을 받았고, 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박제가의 《북학의》에 서문을 썼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여행기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고 평하면서 “오랑캐의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을 앞세운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반청 의식을 극복해야 했다. 중화를 숭상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만주족은 오랑캐였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침략했다. 청은 중화이자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 재조지은이 있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박지원의 하인으로 청나라에 함께 간 장복조차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 다시 태어나도 중국에서 태어나기 싫다고 하였다.
청 초 조선 사람들은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을 가지 못한다(胡運不百年).”고 믿었다.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나라는 건국 백 년이 지났음에도 건륭제 때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루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청과 조선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 선비들이 이런 격차를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의 선비를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 세 분류로 구분한다. 상사는 청을 중화의 의관을 버리고 변발을 한 짐승 같은 되놈의 나라라며 배울 것이 없다고 폄하하며, 조선에서 누구의 입도 막을 수 있는 의리(義理)를 강조했다. 중사는 중원이 오랑캐화 되어 무력으로 씻어내야 중국의 장관을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멸시하며, 중국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박지원은 자신을 삼류 선비인 하사로 칭하며,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과 똥거름이라고 높였다. 민간에서는 깨진 기와 조각으로 담을 쌓을 때 겹쳐 넣어 문양과 구멍을 만들고, 문전 뜰의 바닥을 조약돌과 얼기설기 맞추어 꽃, 짐승 등의 문양을 만들어 장식하였다. 똥오줌은 거름으로 쓰여 금싸라기처럼 아끼고, 이를 벽돌처럼 만들어 거름 창고에 쌓아 올려 누각 모양으로 만드니 천하 문물제도의 기초를 알 수 있다 하였다. 더럽고 누추한 것이라도 활용의 가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박지원이 의리와 존왕양이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조선 선비 중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의 남겨진 법제를 모조리 배워서 우리의 어리석고 고루하며 거친 습속으로부터 바뀌어야” 하며, “우리 인민들이 몽둥이를 쥐고서도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와 대적할 만한 뒤라야, 비로소 중국에는 볼만한 것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는 현실이었다.
조선이 오랑캐라 멸시하는 청나라의 장점을 배우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만주족 오랑캐에 대한 멸시였다. 청나라가 천하를 지배하고 성세를 구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외교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의 연호를 사용했다. 황제는 천하 질서 안에서 역법을 만들고 의례를 통해 문화적 힘으로 시간을 지배하며, 주변의 조공국이 중국의 역법을 채택하고 황제의 연호를 쓰는 것은 그 질서 안에 존재함을 드러낸다. 조선은 청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18세기 대부분의 조선 문인은 사적 기록에서 여전히 명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박지원도 열하일기 첫 편인 도강록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의 힘이 약해서 비록 저 오랑캐를 물리쳐 중원 땅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전통의 문화 제도를 빛내고 회복할 수야 없겠지만, 모두가 숭정이라는 연호라도 능히 존숭하여 중국을 보존하려는 까닭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 열상외사 쓰다.
하지만 베이징에 도착한 8월 1일, 중국의 스물하나 왕조가 삼천여 년 동안 천하를 다스린 통치술에 대해 간략하게 논했다.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받는 폭군 걸왕과 주왕, 진나라의 장군 몽염, 진시황, 상앙 등도 공이 있으며, 그들의 장점을 집대성하고 본받아 발전시켰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장점을 집대성하고 발전시켰다. 수천 년의 통치를 논하며 자연스레 청조에 이르고, 베이징의 역사를 삼황오제 시기 유릉에서부터 나열한다. 베이징의 황성에 기거하는 자는 여진족 만주부이고 직위는 천자이며, 호칭은 황제고, 스스로를 짐으로 칭한다. 왕위가 4대에 이르러 연호는 건륭이라 설명하고,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을 기록하는 자는 누구인가? 조선의 박지원이다. 기록하는 때는 언제인가? 건륭 45년 가을 8월 초하루이다”라고 끝맺었다.
압록강을 건너며 쓴 도강록의 서문에서 숭정 연호를 쓰면서도, 베이징에서 청 연호를 쓰고 있는 주체가 자신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연유로 문체반정에 편승한 문인들로부터 《열하일기》는 “오랑캐의 호칭을 쓴 원고(虜號之藁)”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박지원이 명을 버리고 청을 존숭한 것은 아니었다. 낙후한 조선의 개혁을 위해서는 청에 대한 무조건적인 멸시와 배척을 넘어 현실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했다고 본 것이다.
《열하일기》의 이본 중 하나인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는 다른 이본에 없는 서문이 있다. 글쓴이가 쓰여 있지 않지만, 그 내용이 유득공의 문집인 『영재서종(泠齋書種)』에도 실려 있어 유득공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서문은 《열하일기》를 저술한 박지원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국의) 풍속이나 관습을 기록한 것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治亂)에 관련된 것들이고, 성곽과 궁실에 대한 묘사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며 도자기 굽고 쇠를 다루는 것들에 대한 내용은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길이 되는 내용으로 모두 『열하일기』에 들어 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라는 책은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위에서 잘 지적하듯, 박지원이 중국의 장관으로 깨진 기와 조각과 똥거름을 들고, 하찮은 물건을 버리지 않고 생활에 활용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이용후생의 정신이 《열하일기》를 관통한다. 청나라에 대한 소상한 관찰은 이용후생의 기초를 만들며, 《열하일기》에 수록된 벽돌과 수레에 관한 이야기가 이를 반영한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의 변경 도시인 봉황성에서 박지원은 벽돌로 지은 성곽과 집들을 보고 감탄한다. 청나라의 건축물은 한 틀에서 찍어 규격대로 찍어 네모반듯하게 오차 없이 가공한 벽돌로 쌓아 올리고 벽돌과 벽돌 사이를 종이처럼 얇게 하여 접합하였다. 벽돌로 지은 집은 반듯하고 기둥이 벽 안에 있어 비바람에 노출되지 않았다. 화재가 크게 번질 우려가 없으며, 불필요한 흙과 나무를 쓸 일이 없었다. 벽돌은 돌과 달리 가마에서 구워내니 힘들여 돌을 가공할 필요도 없고, 운반의 수고를 덜 수 있으며, 규격이 일정해 안정성이 있었다. 벽돌 한 장의 견고함은 돌에 비할 수 없지만, 만 장의 벽돌이 아교처럼 붙은 것은 돌이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박지원은 이처럼 수고와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더 안정적이고 공고한 벽돌을 쓰자고 주장했다.
일신수필의 수레 제도(車制) 항목에서는 청나라의 수레를 사람이 타는 태평차, 짐을 싣는 대차, 바퀴가 하나 달린 독륜차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의 수레 제도와 비교하였다. 박지원은 수레는 민생과 관계되어 있어 시급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바퀴와 바퀴 사이의 간격인 궤를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에 수레가 없지 않았지만, 수레바퀴가 궤에 맞지 않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혹자는 조선이 산세가 험준해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한 지방에서 천한 것이 다른 지방에서 귀한 것은 수레가 없어 유통이 제대로 이루이지 못해서이고, 넓은 중국보다 좁은 조선이 가난한 이유는 이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수레가 쓰이지 못하는 것은 선비와 벼슬아치의 죄라고 비판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백 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고 중원에서 성세를 이룬 오랑캐에 대한 반감을 넘어 현실을 직시하길 요청했다. 하찮은 물건에서 장대한 문물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의 곳곳을 설명하고, 실용적인 시각에서 접근해 백성을 부유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이용후생의 정신을 설파했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정조로부터 “요즈음 문풍이 이처럼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박지원]의 죄이다.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처럼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하게 해야 한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국왕이 반응이 이와 같으니 《열하일기》가 “오랑캐의 호칭을 쓴 원고”라는 비판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열하일기》의 공간(公刊)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반면, 민간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열하일기》는 전사(傳寫)되어 널리 퍼졌고, 현존하는 이본만 해도 50종이 넘는다. 19세기에는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연기』와 함께 편집되어 《연휘(燕彙)》라는 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19세기 사행을 가는 이들에게 《열하일기》는 필독서였으며, 19세기 연행록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열하일기』는 조선 사람의 반청 감정을 옅게 만들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청나라를 한 번쯤 구경하고 싶은 곳으로 바꾸었다. 그가 바라던 이용후생의 정신이 전면적으로 구현되지 못했지만, 《열하일기》는 사고의 전환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단행본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