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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200여 종에 달하는 많은 책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책 이름과 저자, 간단한 내용 및 역사적 의의 등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입니다.
<영상 책 이야기>는 교과서 안에 소개된 책을 주제로 하여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는 동영상과 함께 전문가의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교과서 서술 내용에 대한 심화 학습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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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조선말 큰 사전》 – 일제강점기, 한국말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단계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종속시키고자 내세운 구호
이를 위해 일제는 일본어 교육을 강제하는 조선교육령을 선포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로 우리말을 ‘조선어’로 명시했습니다.

말을 모으다 ‘말모이’

조선의 지식인과 애국지사들은 우리 민족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일반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큰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당시 조선인의 문맹률이 매우 높았기에 식민지 현실을 알리고 싶어도 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 신문 한 장은 고사하고 일상 의사소통에 필요한 서신 한 장을 능수하는 자가 역시 100인에 1인이면 다행이라 하겠도다 …”
- 동아일보 사설(1922년 1월)

이에 전국에 야학을 설립해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통일된 철자법과 문법이 없기에 글을 가르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거죠. 이처럼 의미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을 경우, 받침을 어떤 자음으로 써야 할지 표기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표준어도, 띄어쓰기 원칙도, 외래어를 표기하는 규정도 없었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말의 그릇, 사전이었습니다. 당대 지식인들은 이미 어문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국문이 발달해야 사람의 지혜가 열리고 나라 힘이 충실할 것이다.”
-대한매일신보(1907년 5월 23일)

철자법을 정하기 위해 1907년 ‘국문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연구위원이 바로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었습니다. 1911년, 우리 말과 글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모여 사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 사전의 이름은 말모이, “말을 모았다”는 뜻을 가진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였습니다. 그러나, 1914년 말모이 편찬을 주도하던 주시경 선생이 사망하며 아쉽게도 원고는 출판되지 못합니다.

《조선말 큰 사전》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은 이대로 끝났을까요? 15년이 지난 1929년, 사전 편찬 작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스승을 생각하는 한 보람으로 ‘한글 글씨 맞힘’을 따로이 실으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첫째로 스승의 끼치신 뜻을 이으려 함이며 다음으로 오늘날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싶어 하는 뜻을 맞후려 함입니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어 주시경의 뜻을 이어 나갔던 겁니다. 사전편찬을 주도한 인물은 이극로.

그는 독립운동 단체의 지원을 받아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유학 생활을 했던 그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인들이 모국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고국으로 돌아가 모국어를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사전 편찬 작업의 1단계는 단어를 모으는 일.
새로운 사전 편찬 작업에서 15년 전 출판되지 못한 ‘말모이’ 원고는 중요한 자료가 됐습니다.

또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만든 어휘 카드, 약 9만 개의 어휘를 풀이한 교사 이상춘의 기증 원고,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사전》,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영사전》의 어휘 등도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방언’은 방학 때 시골에 가는 학생들에게 숙제로 내 캐어 모았습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중 학교 선생님들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수년간의 연구와 회의 끝에 오늘날 국어 표기법의 근간이 된 한글맞춤법과 표준어 규범을 제정했습니다. 1938년 발행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은 이러한 우리말 규범을 기반으로 편찬된 최초의 국어사전이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과 표준어에 이어 1940년 외래어 표기법 규범을 제정했고, 이를 기반으로 1942년, 마침내 사전의 초고가 완성됩니다.

고유어 74,612개, 한자어 85,527개, 외래어 3,986개. 총 164,125개의 낱말이 초고에 담겼습니다.

그런데!
조선어 말살을 계획한 일제에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는 눈엣가시와 같았습니다. 특히, 1936년 표준말 모음 발표회에서 이극로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에게 축사를 부탁한 것은 일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조선 민족은 조상으로부터 계승해 온 모든 것을 잃고 결국은 국가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다만 조선어만은 보유한 상태이므로 이것의 보급 발달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안창호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사전 제작은 계속됐습니다. 마침내 출판 허가를 요청하고 사전 편찬을 코앞에 둔 그때, 조선어학회 사무실에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동안의 노력이 담긴 원고와 후원자 명단까지 일제의 손에 압수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어학회 회원 33명 역시 검거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

“우리 일행은 그 심한 고문을 계속 당하는 한편 … 폐에 멍이 들어가고 사지가 쑥쑥 쑤시어 죽음이 눈앞에 직면하여 있을 뿐이오.”
- 이석린 회고록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을 독립운동으로 간주했고, 원하는 말을 자백할 때까지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재판을 맡은 일제의 함흥지방재판소는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합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
-함흥지방재판소 예심종결 결정문

3년 후 광복이 되면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석방됩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은 겁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에 압수된 사전 원고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9월 8일.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다행히도 경성역 창고에 원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내란죄’의 증거물로 창고에 방치돼 있었던 겁니다.

1911년에 시작된 말모이 편찬 작업부터 36년간 이어진 노력 끝에 1947년 마침내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출간됩니다.

이후 1957년까지 땀과 눈물로 만든 소중한 우리말 사전, 총 6권의 《큰사전》이 완간됐습니다.

“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 이 글씨는 홀소리(모음) 11자와 닿소리(자음) 17자로 모다(모두) 28자올시다.”
-1928년 이극로 육성, 프랑스 국립도서관

목숨이 오가는 살얼음판 같던 시대에 우리 말과 글을 집대성해 담아낸 ‘큰사전’.
그 속에 담긴 선각자들의 의지와 노력이야말로 식민지 시기를 겪고도 우리가 모국어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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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_한용운
시나리오·구성_이나경
검수_성기지, 명재림, 서명원
촬영- 윤종원
종합편집 - 박인준, 이승신
삽화 _ 김종석, 심희영
녹음·음악 - 조동효
로고 - 민승욱
촬영, 자료 협조 : 국립한글박물관, 독립기념관, 한글학회,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 한국전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PM – 윤종원, 김기원
행정 - 김상희
연출 – 윤종원

해설

조선말 큰 사전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우리말을 모아 편찬한 첫 번째 대사전은 ‘《조선말 큰 사전》’이다. 《조선말 큰 사전》은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명함)’에서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28년 만인 1957년에 총 6권으로 완간되었다. 사전 편찬 계획을 세웠던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고,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교육령(1911년~1945년)’을 시행하고 있었다. 조선교육령의 목표는 ‘조선인을 일본에 충량(忠良)한 국민으로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 ‘민족어’를 말살하여 조선인을 일본에 ‘충성스럽고 선량한 식민지인’으로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기 위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 1912)’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1920)’을 편찬하였다. 이 사전의 편찬 목적은 ‘조선인의 일본어 교육’과 ‘일본인의 조선어 교육’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국문 운동’을 본격화하였는데, 그 일차 목적은 국문 교육을 통한 민중의 계몽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문맹자였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조국을 되찾으려 했던 애국지사들의 열망은 문맹자로 가득찬 현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가 무엇인지’, ‘국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민족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국민[조선인]에게 글[문자]로 전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애국지사들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국민에게 글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었고, 이러한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야학을 설립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그렇지만 당시는 제대로 된 표기법, 문법서, 국어사전이 없었기에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우리말 표기법 제정과 국어사전 편찬을 시도하였는데, 그 첫 사업이 ‘말모이’ 편찬 작업이었다. ‘말모이’는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이 우리말을 모아서 직접 편찬한 최초의 우리말 ‘소사전(小辭典)’이었다. 그렇지만 ‘말모이’ 편찬 작업을 주도했던 주시경 선생이 편찬 도중에 생을 마감하면서 안타깝게도 ‘말모이’는 책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

이후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을 집대성한 ‘대사전(大辭典)’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두었는데, 이극로·최현배·이윤재·신명균·이중화 등의 5명을 집행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한징·이용기·김선기 등의 5명을 사전 편찬원으로 선정하였다. 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년)’ 및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등을 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국어사전을 편찬하려면 ‘표기법 제정’과 ‘표준어 선정’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2년에 마침내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가 완성되어 출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1942)’이 발발하면서 편찬자들이 투옥되고 집필 원고를 일본 경찰에 빼앗겨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

광복 직후 사전 편찬가들이 석방되고, 일본 경찰에 빼앗겼던 원고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우여곡절 끝에 찾으면서 다시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년 후인 1947년 10월 9일에 마침내 《조선말 큰 사전》 1권을 간행하였다. 그렇지만 1948년에 남북에 각기 정부가 들어서면서 2권부터는 남한에서 단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1권 출판 이후 1949년에 2권이, 1950년에 3권이 간행되었다. 그런데 3권이 간행된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전 편찬 작업은 다시 중단되었다. 이후 7년이 지난 1957년에야 마침내 ‘한글학회’(‘조선어학회’를 개명한 이름)에서 총 6권으로 완간하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편찬 작업에 들어간 지 28년 만에 완간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사전의 이름도 ‘《조선말 큰 사전》 ’에서 ‘《큰 사전》 ’으로 바뀌었고, 사전을 편찬한 학회 이름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학회’로 바뀌었다.

《조선말 큰 사전》은 우리 겨레가 대사전 규모로 직접 편찬한 첫 번째 우리말 사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사전에는 표준어(14만 464개)를 비롯한 방언·고유명사·고어·이두·관용구 등 총 16만 4,125개의 어휘가 표제어로 수록되었다. 《조선말 큰 사전》』은 여러 면에서 우리말과 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편찬 의의를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말 큰 사전》은 우리말을 집대성한 최초의 대사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사전의 출판으로 비로소 우리말의 온전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을 계기로 우리말 표기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조선말 큰 사전》을 편찬하지 않았다면,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1)’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을 계기로 우리말 어문 규범이 마련되면서 당시의 우리말 표기를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었고, 또한 광복 직후에 큰 혼란 없이 교과서 편찬 및 공문서 작성을 할 수 있었다.

셋째,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은 남북 언어 이질화를 최소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말 큰 사전》 편찬 과정에서 ‘표기법 제정’, ‘사전 편찬을 위한 문법 및 문체 통일’, ‘표준어 선정’ 등의 작업을 완료하여, 분단 이후의 남북 어문 규범 및 문법이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이질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남북 어문 규범이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어문 규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말 큰 사전》 을 함께 편찬하던 인사들이 분단 이후에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언어 정책 수립 및 사전 편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은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애국지사들은 국민을 계몽해서 조국의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고, 그 출발점이 우리말 사전 편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애국지사들에게 우리말 사전 편찬의 대가는 혹독하였다. 사전 편찬가의 대부분이 옥살이를 하였고, 그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혹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사전 편찬가들은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었으므로, 만약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고달픈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문맹률은 1% 내외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자였고, 심지어 한글 표기법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오늘날의 한국어와 한글의 위상을 가능하게 한 ‘《조선말 큰 사전》 과 이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사전 편찬가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단행본

  • 리의도, 2019,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 이병근, 2000, 『한국어 사전의 역사와 방향』, 태학사
  • 최경봉, 2005, 『우리말의 탄생』, 도서출판 책과함께
  • 한글학회 편, 1992, 『우리말 큰사전』, 어문각
  • 한글학회(조선어학회) 편, 1957, 『큰 사전』, 을유문화사

논문

  • 박용규, 2009, 「일제 강점기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한용운, 2015, 「남과 북의 사전」, 『새국어생활』제25권 제2호, 국립국어원
  • 한용운, 2019, 「현대 국어사전의 편찬 목적과 그 특징」, 한글학회 제80권 제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