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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략과 만국공법 | 한승훈 | ||||
조선말 큰사전 | 한용운 |
《조선책략》과 《만국공법》– 근대 국제질서 인식에 영향을 준 두 권의 책
열강의 각축전이 펼쳐지던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한복판에 던져진 ‘조선’
“… 각국의 인사들이 저작한 《만국공법》, 《조선책략》 ... 등의 책 및 우리나라 교리 김옥균이 편집한 《기화근사》, 전 승지 박영교가 편찬한 《지구도경》 ... 등의 책은 모두 막힌 소견을 열어주고 시무를 환히 알 수 있게 하는 책들입니다.”
-지석영의 상소, 《고종실록》 1882년 8월
중국 중심의 천하에서 근대로 가는 길목, 조선인들이 새로 접하고 참고했던 2권의 책이 있습니다.
조선책략과 만국공법
1908년 7월,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의병의 승리! 그런데,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도 전, 의병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포로들을 죽입시다!” “저들은 우리 가족을 학살했소!” 이 때, 지휘관 안중근이 나섰습니다.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어디다가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역사》
만국공법이란,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서구의 국제법을 통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을 지키면서 싸워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만국공법이라는 단어는 한 책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는데요. 그 책은 미국의 변호사 출신 외교관 헨리 휘튼이 쓴 ‘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로,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한문으로 번역해,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전해졌습니다. 혼란한 개항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국제질서와 국제법의 의미를 알려준 것이 바로 이 책 ‘만국공법’이었습니다.
“주권을 가진 국가는 서로 평등하며 국제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된다.”
- 만국공법
만국공법에 따르면, 주권을 가진 국가는 서로 평등하며 국제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됩니다. 만국공법은 근대 국가 간 교류의 기반이 됐습니다. 문제는, 만국공법이 서구국가를 중심으로 정립됐다는 점이었습니다. 1876년 일본이 강화도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거론한 근거도 만국공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 3개 항구를 개항하고 해안측량권을 주는 등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한 권의 책이 조선의 역사에 등장합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집필한 《조선책략》. 조선의 외교 방향을 제시한 책이었는데요.
1880년, 조선 정부는 수신사 김홍집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강화도조약으로 쌀이 일본에 무관세로 유출되며 쌀값폭등과 식량부족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서구와 조약을 체결한다면 만국공법에 따라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어요.”
비록 일본 정부의 거부로 조약은 개정되지 못했지만 김홍집은 일본에 있던 청나라 외교관을 만나 조선이 서구와 조약을 체결한다면 만국공법에 따라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때 청나라 외교관으로부터 책 1권을 전달받는데요. 이 책이 바로 조선책략이었습니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합하며, 미국과 연대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 《조선책략》
과연 조선을 위한 조언이었을까요? 조선책략은 청나라의 입장에서 조선의 외교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겪고 있었고,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고 있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속방을 빼앗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조선이 자국의 속방임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조선과 서구 열강의 조약 체결을 주선한 겁니다.
신미양요의 적국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습니다. 특히 유생들의 반대는 격렬했습니다.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유포된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 1881년 만 명의 유생들이 올린 〈영남만인소〉
“다른 나라 사람의 《사의조선책략》의 글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것도 없지만, 그대들도 또 잘못 보고 지적함이 있도다. 만약 이것에 빙자하여 또다시 번거롭게 상소하면 이는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 대우하여 엄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고종실록》 1881년 2월 〈영남만인소〉
결과적으로 조선책략의 주장은 조선이 미국을 비롯해 서구국가와 수교하는 계기가 됩니다. 1882년 청의 중재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인들은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나라와 교류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은 과거 중국 중심의 천하와는 다른 질서에 놓여 있음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려는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속방관계를 벗어나려 했습니다.
1883년부터 조선은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서구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할 때 청의 중재를 거부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또, 미국에 외교관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청나라의 압박을 피해 1887년 최초로 주미 공사를 임명·파견하기도 합니다.
“만국공법에 타 국가의 내치를 간섭할 수 없다고 쓰여있소.”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을 빌미로 일본이 조선에 내정간섭을 시도하자, 조선 정부는 ‘만국공법’에 따르면 타 국가의 내치를 간섭할 수 없다며 일본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1897년, 마침내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그 이름을 바꿉니다.
“《만국공법》에, ‘자주권을 갖고 있는 각 나라는 자기 의사에 따라 스스로 존호를 세울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승인하게 할 권리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구라파와 아세아 각 대륙에서 똑같이 준수하는 것입니다”
- 《고종실록》1897년 10월 〈영남만인소〉
그러나, 19세기는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르던 제국주의 열강의 시대.
만국공법이 주장하는 주권 평등 원칙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힘을 기른 서구 국가에만 적용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비 서구 국가는 미개한 나라로 간주됐고, 국제법의 동등한 주체가 될 수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만국공법을 활용했던 겁니다.
새로운 국제질서로 향해가던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에게 희망이 되어준 동시에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알려준 책, 《만국공법》, 그리고 《조선책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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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 한승훈
시나리오·구성 : 이나경
검수 : 한성민, 명재림, 서명원
촬영 : 윤종원
종합편집 : 박인준, 이승신
삽화 : 김종석, 심희영
녹음·음악 : 조동효
로고 : 민승욱
촬영, 자료 협조 : 인천개항박물관,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PM : 윤종원, 김기원
행정 : 김상희
연출 : 윤종원
조선책략(朝鮮策略)
《조선책략》은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으로 근무했던 황쭌셴(黃遵憲)이 조선의 국제적 지위 및 대비책을 적은 책이다. 이 책의 원래 명칭은『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며 일반적으로《조선책략》으로 칭한다. 황쭌셴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청나라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조선책략》을 작성했으며, 《조선책략》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있었던 김홍집을 통해서 고종과 조정에 전달되었다. 《조선책략》은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미국과의 조약 체결 및 서구를 향한 문호개방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880년 5월 조선 조정은 수신사 김홍집을 일본의 도쿄에 파견하였다. 그의 파견 목적은 강화도조약에 따른 대일무역의 무관세규정과 미곡수출이 가져오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에서 김홍집이 교섭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지 못한 점을 거론하면서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자 김홍집을 찾은 황쭌셴은 대일 교섭 및 통상과 관련해서 정통한 주일청국공사 허루장(何如璋)과 만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청국공사관으로 가서 허루장(何如璋) 및 황쭌쏀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김홍집은 허루장으로부터 청나라가 이리(伊犁)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하고 있으며, 그 국경분쟁의 여파로 러시아가 함대를 조직해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 허루장은 김홍집에게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있는 균세(均勢)법을 소개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균세법에 따라서 조선이 강한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것 같으며 각국과 연합해서 견제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허투장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해서 서구 열강 중에서 미국과 먼저 조약 체결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황쭌셴(黃遵憲)은 조선의 대외 정세 및 향후 취해야 할 정책, 그 중에서도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우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책략》을 전달하였다.
《조선책략》은 러시아가 지구상에서 3대주에 걸쳐서 영토를 차지하고 100만여명의 육군 및 200여척의 해군 함정을 보유한 국가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러시아가 유럽을 비롯해서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팽창을 거듭하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가 힘을 합하여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다음에는 러시아가 유럽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팽창의 방향을 아시아로 전환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할린을 비롯해 연해주 일대를 차지했음을 언급하였다.
황쭌셴이 러시아의 대외 팽창정책, 특히 아시아로의 진출을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조선과 관련이 깊었다. 그는 조선이 아시아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조선이 위태로우면 동아시아의 형세가 위급해질 것이라면서 조선의 지리적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뒤이어 그는 조선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도 조선을 먼저 침략할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황쭌셴은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서 조선이 시급하게 취해야 할 방어책으로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 親中國) 일본과 맺으며(결일본 : 結日本) 미국과 연결할 것(연미국 : 聯美國)을 제안하였다. 먼저 조선이 친중국(親中國)을 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한 것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적·지리적 긴밀성과 더불어 조선과 중국의 오랜 속방관계였다. 이에 《조선책략》에서는 조선이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중국을 섬겨야지만 러시아가 조선이 고립되지 않음을 알고 함부로 조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황쭌셴은 조선과 일본이 이웃에 위치했기에 조선이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는다면 러시아를 비롯한 외세가 함부로 양국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면서 결일본(結日本)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책략》에서는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황준쏀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벗어난 부강한 국가이지만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나아가 다른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미국은 청나라와 분쟁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국가이며 일본에서는 군사 훈련을 돕고 일본의 조약 개정에 협조적이라는 구체적인 사실도 언급하였다. 즉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는 서구 열강 중에서 아시아 각국에 침략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서 미국을 소개함으로써, 조선이 서구 열강 중에서 미국과 우선적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조정에 《조선책략》을 전달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구를 향한 문호개방을 결정했으며 《조선책략》의 “연미국(聯美國)”에 따라서 미국을 조약 체결의 첫 번째 국가로 정했다. 국내에서는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만손을 비롯한 유생들은 「영남만인소」를 통해서 《조선책략》에서 제시한 조선의 대미 수교 방침을 비판하였다. 「영남만인소」에서는 러시아의 위협을 방지한다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의 논리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해서 러시아의 침략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조선의 인민과 재물을 침탈할 것이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핑계로 조선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위정척사파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의 폐기와 더불어 그 책을 유포한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했다.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882년 4월 6일(양력 5월 22일)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관철시켰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한때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 세력들이 임오군란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청군에 의해서 군란은 진압되었다.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고종은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는 전교를 내렸다. 그 전교에서 고종은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전하면서, 외국과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다만 공법에 의거할 뿐”이라면서 《만국공법》에 입각해서 국가 간 관계를 맺을 것을 밝혔다.
이상과 같이 조선은 《조선책략》을 계기로 미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서구식 근대적인 국가관계에 돌입하기 위한 정책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조선책략》에는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 일본의 류큐 병합 등으로 촉발된 위기감 속에서 조선을 자국의 ‘속방’으로 유지하려는 청나라의 대외정책 기조가 담겨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청나라는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주선하면서 조약문 제1조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내용을 명문화하려고 시도했으며, 그 뜻이 관철되지 않자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그 일환으로 조선에 조청 속방관계를 강화한 내용이 담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관철시켰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만국공법》은 넓게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서구의 국제법(International Law)을 통칭하는 용어이며, 좁게는 1864년 선교사이자 법학자 윌리엄 마틴(William A. Martin; 중국명 丁韙良)이 미국의 국제법 학자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의 『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한문으로 번역·출판한 《만국공법》을 의미한다.
《만국공법》은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총 12장 231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는 국제법의 형성과정 및 정의, 국제법의 주체인 주권국가를 소개하였다. 제2권은 국가의 기본권을 설명하고 있으며, 제3권은 평시에 국가가 행사하는 외교권을 다루고 있으며, 제4권은 전시 국제법을 설명하였다. 마틴은 휘튼의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본에 없는 내용들을 추가함으로써 서구에서 국제법이 정립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한편 《만국공법》의 번역 및 출판, 그리고 동아시아로의 전파는 청나라, 일본, 그리고 조선이 세계를 향해서 문호를 개방하는 일련의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1842년 청나라는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을 향해 문호를 개방했다. 1854년 일본은 미국과 맺은 가나가와조약(神奈川條約)을 계기로 서구 열강과 국교를 맺음으로써 문호를 열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며, 6년 뒤인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했다. 당시 청나라, 일본, 조선이 서양 각국과 체결한 조약은 서구의 국제법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서구의 국제법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유럽의 기독교 국가를 중심으로 정립된 규범이었다. 그 규범에는 국가 간의 상주 사절단 파견, 무역 규정 및 조약 체결 등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규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서구의 국제법에 기반한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구사했다. 구체적으로 영국은 아편전쟁(1839~1842)을 통해서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난징조약을 관철시킴으로써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시켰고, 1860년 베이징을 무력으로 함락시킨 영국과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서 청나라로부터 베이징에 외교관을 상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미국은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일본에서 무력시위를 전개함으로써 가나가와조약(神奈川條約)을 관철시키고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를 개항시켰다. 일본은 조선에 운요호 사건을 비롯한 포함외교를 통해서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관철시키고 3개 항구의 개항, 조선 연해의 측량, 영사재판권(치외법권), 서울에 상주외교관 파견 권리 등을 획득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식 근대적인 조약을 통해서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서구의 국제법에 기반한 국가 간의 교류 및 교섭의 일련의 절차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서구식 근대적 조약을 맺은 국가들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기구인 총리아문(總理衙門)을 설치했다. 총리아문에 부설된 서양식 교육기관인 동문관(同文館)에서는 1864년 마틴과 청나라 학자들이 휘튼의 『국제법 원리(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번역서의 이름을 “《만국공법》”으로 붙였다. 《만국공법》은 출판된 이듬해인 1865년 일본 에도막부가 수입해서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조선에서는 연행사절단으로 베이징에 다녀온 박규수, 오경석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인사들이 《만국공법》을 비밀리에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조정 차원에서는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만국공법》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당시 일본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이야기하면서 조선 측에 근대적인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1877년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강화도조약에 있는 개항장의 선정 및 관리의 수도 상주를 관철하기 위해 조선으로 갔다. 그는 홍우창과 만난 자리에서 천하 각국이 조약을 통해서 수교를 맺으면 “공사를 상호간에 파견”하여 수도에 주재하면서 교류를 한다면서 그 원리가 만국공법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하나부사는 예조판서 조영하에게 외교관과 영사관의 권리와 임무가 소개된 『성초지장(星軺指掌)』과 함께《만국공법》을 전달하였다.
1880년대 초반《만국공법》은 조선이 서구를 향한 문호를 개방하는 중요한 근거로 작동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은 강화도조약으로 쌀이 일본에 무관세로 유출되는데 따른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갔다. 하지만 일본 측의 거부로 김홍집은 강화도조약의 개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일본 도쿄에서 주일청국공사 허루장(何如璋)과 참찬관 황쭌셴(黃遵憲)을 여러 차례 만났다.
김홍집은 허루장으로부터 청나라와 국경분쟁을 하고 있는 러시아가 함대를 조직해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허루장은 김홍집에게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만국공법》에 있는 균세(均勢)법을 제시했다. 균세(均勢)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한문으로 번역한 용어로, 마틴은 균세법를 약소국이 강대국이 구축한 질서에 편입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는 책략으로 설명하였다. 주일청국공사관의 참찬관 황쭌셴(黃遵憲)은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권유한 《조선책략》을 건내줌으로써 《만국공법》의 균세법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 밖에 황쭌센은 《만국공법》에 입각해서 조선 조정에서 쌀 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홍집은 조정에 《조선책략》을 전달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구를 향한 문호개방을 결정했으며 《조선책략》의 “연미국(聯美國)”에 따라서 미국을 조약 체결의 첫 번째 국가로 정했다. 그러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서구 열강과의 국교수립을 위해서 《만국공법》에 정통해야 한다는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만손을 비롯한 유생들은 영남만인소를 통해서 《조선책략》에 따른 조선의 대미 수교 방침을 비판하였다. 홍재학은 《만국공법》 등이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면서 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였다.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882년 4월 6일(양력 5월 22일)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관철시켰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세력들이 임오군란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청군에 의해서 군란은 진압되었다.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고종은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는 전교를 내렸다. 그 전교에서 고종은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전하면서, 외국과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다만 공법에 의거할 뿐”이라면서 《만국공법》에 입각해서 국가 간 관계를 맺을 것을 밝혔다. 그러자 유생 지석영은 민인들이 서구와의 교류 및 교섭에 익숙하지 않기에 《만국공법》 등을 널리 유포시키고 읽혀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관리 변옥도 《만국공법》이 천하에 두루 쓰이는 서적임을 강조하면서 전국에 배포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만국공법》이 조선에 공식적으로 유통되면서 마틴이 번역한 또 다른 서구 국제법 저서인 블룬칠리(Johannes. C. Bluntschli)의 『공법회통(公法會通)』(원제는 『문명국들의 근대 국제법(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ten)』) 등이 조선에 유통되었다. 그러면서 《만국공법》은 서구의 국제법을 통칭하는 용어로 정립되었디. 김옥균과 박영효는 《만국공법》을 근거로 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였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적으로 점령하자 조선의 외교를 담당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김윤식은 《만국공법》을 거론하면서 영국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1888년 일본 어민이 불법적으로 부산의 어장을 침범하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서리 조병직은 《만국공법》을 언급하면서 일본 어민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1889년에 프랑스 공사관에서 일하는 김창여라는 인물이 폭력사건에 연루된 상태에서 공사관에 숨자, 조병직은 《만국공법》을 다룬 저서에서 나온 외교관의 권한 범위를 제시하면서 김창여의 소환을 요구했다. 1894년 동학 봉기를 빌미로 일본이 조선에 내정간섭을 시도하자, 조선 정부는 《만국공법》에 따르면 타 국가의 내치를 간섭할 수 없다면서 일본 측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의 조야에서는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인을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08년 안중근은 의병 투쟁을 전개하면서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국제법에 의거해서 풀어주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근대 시기 한국에서 《만국공법》은 서구의 국제법을 통칭하는 용어이자 서구 국제법을 소개한 저서의 제목으로 알려졌다. 《만국공법》은 서구가 비서구 지역인 동아시아 국가와 국가 관계를 맺는 기본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구 열강은 포함외교를 단행함으로써 동아시아 국가에 불평등한 조약을 관철시켰으며, 이를 모방한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통해서 조선에 조약의 불평등한 내용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만국공법》을 기반으로 서구식 근대적인 국가관계에 돌입하였으며, 이후에도 《만국공법》은 국가 간 관계를 규정하고 국가의 독립을 유지해 주는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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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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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