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의 교화 윤리서
이 밖에 『소학』, 『효경(孝經)』, 『내훈(內訓)』 등의 윤리서도 보급되었다. 특히 『소학』은 사림에 의해 개인적인 수신 윤리서로 많이 보급되었다. 연산군과 중종대에 금서(禁書)로 낙인찍히기도 하였지만 일상생활의 윤리서로 많은 사람이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삼강행실도』에는 자기 손가락을 잘라 어미를 살리는 비정상적인 사례가 많아 16세기에 가면 교화의 방법으로 『삼강행실도』보다 일상적인 윤리를 강조한 『소학』을 더 중시하는 경향도 생겼다. 사림이 집권한 명종대에는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나 허벅지를 베는 할고(割股)는 그다지 귀중할 것이 없으며, 심지어 그 중에는 명예를 구하는 자도 있다고 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강하게 비판하는 소리도 나타났다.114) 이러한 인식은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고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입장이 관철되어 가면서 『소학』의 중요성이 한층 강화된 결과였다.
윤리서의 보급을 통해 성리학의 사회 사상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깊숙이 확산될 수 있었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점차 바꾸어 나갔다. 점진적이지만 광범위한 변화가 조선 사회의 밑바탕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사회의 유교적 규정성을 강화시켜 주면서 통치 질서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집권층은 유교적 윤리 질서를 자연스럽게 인식시키는 과정을 통해 국가·가족·향당으로 표현되는 공동체의 내부 결속력을 강화해 갈 수 있었다. 윤리서 편찬의 추이를 살펴보면 집권층이 어느 시기에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사회의 결속을 도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윤리서 속에는 바로 그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114) | 『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3월 29일(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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