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성격의 창가
우리나라에 ‘학교’라고 하는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 ‘언더우드학당’, ‘이화여학당’, ‘정신여학당’ 등이 설립되었다. 1885년 배재학당의 설립 이후 수 많은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1910년까지 설립된 ‘미션스쿨’은 무려 796개에 이르렀다.214) 이들 학교에서는 한문·역사·지리·수학·과학 등의 일반 과목 외에 성경 과목과 ‘찬미가’를 가르쳤다. 이때의 ‘찬미가’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영어식 찬송가를 교재로 하였으므로 서양의 근대적 조성음악 언어가 기초적으로 교육되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 중 근대 음악의 선구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예컨대 1897년 평양에 문을 연 숭실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학생들 중 다수의 근대음악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김인식, 김형준, 김영환, 박태준, 안익태, 현제명, 김동진 등이 그들이었다. 이렇듯 찬미가의 영향력은 범시민을 상대로 음악회를 열었던 군대의 군가보다 상대적으로 미미하였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후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양악적 감수성을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높다.
한편, 1906년 일본의 통감부에 의한 제1차 학교령이 시행되면서 관·공립학교의 모든 제도와 규칙이 일본식으로 개편되고 음악은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일본식으로 개편된 교육제도를 통해 우리나라의 정식 음악교육이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일본인이 만든 음악 교과서를 가지고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보통학교의 학과목의 명칭은 ‘창가(쇼오카)’였는데 주로 일본 창가를 가르쳤으며 상급학교에서는 ‘음악(온가쿠)’이라는 학과목으로 일본 창가 외에 악기 사용법과 기악곡이 교과 내용에 포함되었다.
창가는 20세기 이후 생겨난 새로운 용어로서 영어의 Singing을 번역하여 일본의 교과목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일반화된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1880년대부터 근대식 학교 교육에서 ‘쇼오카(唱歌)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쇼오카’는 일본 전통 음악에 양악을 절충한 노래로서 소학교에 적용한 것이었다.215)
1910년에 조선통감부는 『보통교육 창가집』 제1집을 발행하여 관·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에 이르는 전학교의 음악교과를 통일시킴으로써 한국의 근대 음악교육을 장악하였다.216) 이에 따라 1910년까지 3천 개에 달하는 일반 사립학교에서 ‘창가’라는 이름의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처음 사립학교의 창가는 애국사상과 자주독립 사상, 자유민권 사상 등의 새로운 이념과 정신을 가르치는데 효과적인 도구로서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실천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각종의 애국가를 비롯하여 자유민권사상을 고취하는 계몽가요, 학업과 실력 배양을 강조하는 교육 창가 등이 불려졌는데, <애국가>, <무궁화가>, <전진가>, <국기가>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학도가>, <학문가>와 같은 일본식 창가가 대거 유입되자 사립학교에서 배우던 애국가류의 계몽가요는 비공식적인 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학도가>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창가로 알려져 있는 <철도창가>217)를 번역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요나누키 장음계218)에다 4분의 2박자의 한도막 형식으로 된 창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부의 인가를 받지 않고 통용된 민간인 발행의 창가집에서도 애국계몽운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사를 바꾸어 수록될 만큼 당시 유행하였던 곡이다. 『보통교육 창가집』에 실린 대부분의 창가는 2/4박자나 4/4박자 위에 일본식의 7.5조 운율과 요나누키 장음계로 만들어진 일본 창가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창가로 상징되는 한국의 근대음악 교육의 첫 시작이 한국 전통음악적 감수성을 일본의 근대음악 감수성으로 대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창작 양악 1호로 알려진 곡 역시 <학도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1905년 김인식(1885∼1962)이 작곡한 <학도가>가 바로 그것이다.219) 평양 서문 밖 소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서 부르기 위한 노래로 창작된 것인 만큼 일종의 운동회가였다. 이 노래는 서양 음악 어법으로 된 우리나라 창작음악의 시발이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인식의 뒤를 이어 한국 초기 양악사에서 중요한 작곡가로서 평가받는 이상준 역시 <학도가>란 제목의 창가를 작곡하였다.
이렇듯 20세기 초반에는 <학도가>, <권학가>, <학생가> 등 같은 제목 하에 서로 다른 악곡과 가사로 이루어진 많은 창가들이 노래되었고 이러한 창가들이 민간에서 발행하는 창가집 형태로 악보화 되어 유포되었다. 당시 ‘각종’ 창가집은 민간에서 발행한 악보집으로 배움과 국권회복, 봉건타파 등의 내용이 담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노래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