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 동요로
20세기 초기에 양악적 문법에 기반하여 창작에 참여하였던 음악가들은 김인식, 이상준, 홍난파, 정사인, 백우용 등이었다. 이들은 선교사, 양악대 또는 에케르트에게서 서양 음악을 배웠던 서양 음악 1세대이다. 이들은 모두 양악의 초기 장르인 창가를 통해 창작음악의 역사를 개척한 음악가들로 오선보를 이용한 창가를 만들었다. 이후 창작창가는 동요·예술가곡·대중가요 등으로 분화되면서 양악은 근대라는 힘의 언어로 상징되며 점점 전통음악의 공간을 점유하게 되었다.
‘어린이 노래’라는 의미에서 ‘동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이다. 그 이전까지 ‘동요’는 정치와 사회의 풍자성이 강한 참여적 성격을 띈 민요 개념을 나타내고 있을 뿐 현대 통용되는 ‘어린이 노래’라는 뜻을 지칭하지 않았다.220) 그러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서 동요라는 용어가 민요와 함께 『폐허』, 『백조』, 『개벽』 등의 잡지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동요는 어린이 노래로서 창작 동요였다.221)
당시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식민지 조선의 어린리이들에 게 정서를 함양시켜주고 애국정신과 민족혼을 고취하기 위하여 서양 음악적인 창작 방법에 기반한 동요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창작 동요의 시발은 식민지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동요운동은 방정환(1899∼1931)이 조직한 ‘색동회’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색동회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윤극영(1903∼1988)은 오늘날까지 전 국민의 민요처럼 불리웠던 <반달>(1924년 (作))을 비롯하여 <설날>(윤극영 작사), <고드름>(유지영 작사), <귀뚜라미>(방정환 작사) 등 수 많은 동요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 이후 “나리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봄나들이>(윤석중 작사, 권태호 작곡),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하는 <자전거>(목일신 작사, 김대현 작곡),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시작하는 <어린음악대>(김성도 작사 작곡),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가자--”로 시작하는 <달따러가자>(윤석중 작사, 박태현 작곡),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로 시작하는 <산토끼>(이일래 작사 작곡) 등 한국 동요의 고전으로 불려져온 수많은 동요들이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 이 동요들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어린이들의 동심을 노래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대 교회나 방송은 동요가 널리 보급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조선총독부의 통제하에 일본 창가가 가르쳐지고 있었으나 교회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양악을 전공한 음악가들은 대부분이 교회에서 서양 음악을 접하고 양악적 감수성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회는 찬송가에 국한되지 않고 세속음악까지 아우르는 중요한 음악활동의 장으로서 자리매김되었다. 교회는 찬송가뿐만 아니라 동요를 가르치는 음악 교육의 산실로서도 기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7년에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1933년부터 창작 동요를 방송하기 시작하였고, 유성기 음반을 통하여도 창작 동요가 발표되어 대중 매체를 통한 동요 보급도 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