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경장 전후의 사회 문화
문호개방과 더불어 사회변동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자체변동과 제국주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변동이 중첩해서 진행되어 복잡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부터 갑신정변·동학농민전쟁·갑오경장·청일전쟁·을미사변, 그리고 1896년의 아관파천에 이르는 가운데 정치는 주체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회 문화의 변화는 자율성을 확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회 문화의 변화는 동학농민전쟁의 폐정개혁안의 제기나 갑오경장 때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처럼 자율화과정을 통하여 토착한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는 일본제국주의의 관여와 방해로 토착화가 차단되거나 정치 경제는 타율성으로 끝난 경우가 많은데 비하면, 사회 문화는 자체적으로 자율화과정을 밟은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 안에서 민족문화가 존재했던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구한말의 가장 큰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의 폐정개혁안과 갑오경장의 사회 문화 개혁의 요목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란·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봉기·갑오농민전쟁 등으로 관점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424) 동학농민전쟁은 전기항전(1894. 양력 2. 10∼6. 11)과 집강소 설치기(1894. 6. 11:음 5. 8∼10. 26:음 9. 18)와 후기독립전쟁기(1894. 10. 26∼12. 30)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에서 농민전쟁 이념은 집강소 사회개혁의 성격이기도 한 폐정개혁안으로 나타났다. 폐정개혁안은 12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분류해서 보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탐관오리·부호·유림 양반 등의 지배층 숙정 ② 노비·칠반천인·백정·청춘과부의 해방 ③ 잡세금지·지벌타파·공사채 무효·왜와 간통엄벌의 시폐개혁 ④ 토지 평균분작
폐정개혁안에서 구조개혁을 위한 제도개혁에 대한 언급이 약한 것은 지도역량의 한계였다. 하지만, 신분제 혁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구조적 모순과 시대적 모순을 일치시켜 이해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안은 일부 갑오경장에 반영되기는 했으나 갑오경장 추진세력과 주체 성격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것이 당장의 역사 발전의 빌미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갑오경장에서 제1차개혁은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영의정 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기무처가 주도하여 210건의 사안을 개혁한 것이다. 거기에서 청나라에 대한 독립을 천명하고, 의정부와 궁내부를 양립시키고 6조를 8아문으로 나누고,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제를 혁파하고 공사 노비를 해방하고 과부 재가를 허용한 것 등은 동학농민전쟁의 폐정개혁안과 더불어 1894년에 사회 문화가 크게 변혁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신분제 혁파가 혁명적 조처였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과거제도만 해도 고려 초에 실시한 1천년의 역사를 폐지한 것이다. 과거제가 유교왕조를 일으키고 또 유지시키는 기초가 됐던가 하면 유교사회와 유교문화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그의 폐지가 앞으로 사회 문화를 다양하게 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을 전망하기 어렵지 않다. 과부 재가를 금지했던 한국 봉건사회의 암적 특질을 해체한 것은 신분제 혁파에 버금가는 일대 전환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만든<신식화폐발행장정>에서 일본 화폐의 통용을 허용한 것처럼,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개혁한 타율성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의 강요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 음모와 함께 추진한 제2차 개혁과 제3차 개혁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제2차 개혁은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 213건의 개혁안이 실시되었는데 역시 김홍집내각의 박영효가 주도하고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조종을 받았다. 거기서<홍범14조>를 선포하고425) 내각을 7부로 나누고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구획했다. 그때 관세사와 징세사, 그리고 재판소와 경찰청을 독립시키고,<敎育立國詔勅>이 발포되어 성균관과 향교외에 한성사범학교를 선두로 국공립 각급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새로 교과서가 편찬되고 역사편찬도 새롭게 일어났다.426)<소학교령>이 나와 오늘날의 교동·재동·매동초등학교의 모체가 세워진 것이다. 제3차개혁은 제3차 김홍집내각이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공사 미우라 코로의 조종을 받으며 140여 건의 개혁을 실시했는데 양력사용과 단발령 강행이 대표적 사안이었다. 그것이 강한 저항에 부딪쳤는데 1백년이 지난 이제는 모두 단발하고 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타율성의 자율화과정의 여러 유형중의 하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사회 문화는 어떤 것은 고대부터, 어떤 것은 조선시대부터, 어떤 것은 갑오경장부터 유래하였다. 어떤 것은 식민지시기에, 또 어떤 것은 민주화운동에서 유래한 것도 있다. 언제부터의 것이냐에 따라 역사적 성격을 달리 한다. 그런데 갑오경장에서 조선시대의 기본 윤리인 삼강오륜이나 관혼상제에 대한 검토는 수행되지 않았다. 개혁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법률상의 규범은 고사하고 윤리적 통제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회기강이 설 수가 없었고, 각종 종교가 난무해도 조정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문화 무정부 상태가 연출되고 있었다. 무정부상태가 자율성에 의한 결과라면 걱정할 것이 아니지만 타율성에 의한 현상이므로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침략에 도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역사적 생산물은 자율성 여부와 타율성의 자율화과정을 검토하면서 살펴야 한다. 아울러 주의할 것은 자율성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만하거나 자기우상에 빠지면 그때는 당초의 발생가치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해치고 만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