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광무제의 외교투쟁
외교투쟁이라면 당연히 정부에 의해서 전개될 문제였지만, 그때의 정부 요인은 1904년 이래 일본에 매수되어 매국노의 길에 빠져 있었다. 한일의정서로 나라가 기운 것을 보면서 영국에서 자결 순국한 李漢應 공사 같은 지사도 있기는 했지만447) 각료들 대부분이 정신이 마비되어 자주 정부의 각료 구실을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외롭게 비밀리에 항쟁한 딱한 처지에 있었다.448) 임금이 각료를 믿지 못하고 밀령을 발부하던 것은 1904년부터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1894년 7월 23일 갑오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이 삼남지방에 밀지를 보내 근왕병(의병) 봉기를 종용했던 데서 효시를 찾을 수 있다.449) 그후 유인석·최익현·김도현·이은찬·이강년, 그리고 1914년 임병찬까지 국권을 상실하던 20년간 적지 않은 의병장이 밀지를 받아450) 충의를 맹세하며 항쟁한 경우를 본다.
그러나 외교투쟁은 1904년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국외 중립을 천명했던 것도 일부는 비밀 외교로 추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구체화되자 비밀외교의 대상이 미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이 1898년 하와이와 필리핀을 정복하면서 태평양 지배국가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주변은 중국·러시아·일본·미국의 4나라가 둘러싸고 있는데 그때 미국만이 한국 침략에서 뒷짐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 제1조에서 “양국은 서로 돕고 거중알선하여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문구에 의지해 보는 막다른 길에 서 있는 한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을 짓밟고 말았다. 그것이 테프트-가쓰라 협정이었고, 그에 따라 일본의 한국침략을 보장한 포츠머드조약을 거중알선하였다. 그의 공로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제국주의가 노벨상까지 지배했던 것이다.
이제는 대한제국이 믿을 나라가 있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고안한 것이 국제회의에 특사를 밀파하여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길이었다. 그것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전개된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헤이그밀사사건이었다. 민비와 대원군이 죽은 뒤의 광무황제는 외로운 처지에 있었지만 그 전의 임금 모습보다는 오히려 왕도를 지키는 듯 했다. 헤이그밀사사건의 꾸밈 자체도 그것이지만, 그때 매국 각료들이 을사늑약에 비준할 것을 주달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임금에서 물러났다.451) 그후 隆熙帝(순종) 정부는 일본의 괴뢰와 다름이 없었다. 융희제가 즉위하자 한일신협약(정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부의 감독을 받아야 했고,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부의 시정개선위원회 결정사항에 따라야 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뒤이은 일본정부의<對韓施設綱領>제3항에서 재정을 압박하여 親衛隊외의 군대를 해산한다는 계획에 따라 서서히 감군하다가 정미조약과 동시에 전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1907년 8월 1일부터 1주일 내에 친위대만 남기고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에 주둔한 진위대를 모두 해산하였다. 그해 6월부터 헤이그밀사사건, 광무제와 융희제의 교체, 정미조약에 이어 군대를 해산한 망국사태가 1907년 6·7·8월을 메웠다. 그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이름조차 없어질 때까지 3년간은 망국 절차를 밟던 기간에 불과했다. 그때 어떤 민족운동 단체도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452)
447) | 李漢應 공사(서리)가 순국한 것은 1905년 5월 12일로서 을사늑약 6개월전이었다. 그때의 유서에서 “嗚呼·國無主權·人失平等·凡關交涉·恥辱罔極·苟有血性·豈可堪忍乎”라 한 것을 보면 영국에서 일본 외교관의 간섭을 받아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있던 나머지 자결한 것으로 이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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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 | 박희호,<외교활동>(≪한국사≫43, 국사편찬위원회, 1999), 13∼80쪽. |
449) | 李晩燾,≪響山文集 附錄 年譜≫, 甲午 9월조(趙東杰,<響山 李晩燾의 독립운동과 遺志>,≪韓國近現代史의 이해와 論理≫, 지산업사, 1998, 211쪽). |
450) | 의병전선에서 밀지를 받았다는 인원은 의외로 많다. 혹은 ‘위장 밀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장도 의병 봉기를 독촉하기 위한 좋은 의미의 것도 있고, 혹은 사기성 위장으로 보이는 것도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
451) | 1907년 7월 17일 8대신이 주달한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金光濟·崔承學, ≪大同報≫제3호, 大同月報社, 光武 11년 7월 25일, 35쪽). ①光武 9년 11월 17일의 新條約에 御璽을 押할事 ②皇太子殿下께 攝政을 推薦할事 ③皇帝陛下께서 일본 동경에 親幸하사 일본 황제께 謝過할事 |
452) | 趙東杰,<舊韓末(1909) 國民演說會 小考>(≪韓國民族主義의 성립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 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