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의병전쟁의 전개
의병이 봉기한 것은 189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세 변화에 따라 해산하고 1904년 활빈당으로 종결된 광무농민운동이 의병으로 전환하면서 의병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것을 시기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전기의병(1894∼1896);갑오의병은 1894년 갑오왜란에 대한 안동의병과 상원의병을 말하는데 근왕병 성격이고, 을미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의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의 을미개혁에 저항하여 전국 유림이 봉기했는데 근왕병과 척사의병의 복합성격의 것이었다. ② 중기의병(1904∼1907);1904년 한일의정서에 항거하여 광무농민운동(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하고, 1905년 을사늑약 때 전국에서 유림의병이 봉기했는데 국가주의 의식이 부상, 민중의병과 유림의병이 병존 연합 혼재했다. ③ 후기의병(1907∼1909);1907년 6·7·8월 망국사태의 전개와 더불어 해산군인이 참전하여 의병전쟁을 발전시킴. 국가주의가 확산되었고, 각계각층의 의병이 참전한 국민전쟁 성격이다. ④ 전환기의병(1909∼1915);유인석·이범윤·안중근의 경우처럼,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해 가는 시기의 의병전쟁으로 국내에서는 민중의병이 전선을 주도했다. 민족주의가 부상했던 시기였다. ⑤ 말기의병(1915∼1918);일제 강점하에서 해외 독립군으로 전화하지 못한 잔류의병이 3·1운동 직전까지 산발적으로 항전한 의병이다.453)
의병이란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을 말한다. 굳이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전쟁 의사를 결정하는 국왕이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발송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거나 궁전이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국왕이 매판 각료에 포위되어 주권 의지의 표현이 제약을 받고 있을 때, 주권 의지는 국민 또는 민족에 의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었는데, 민족의지가 의병 봉기로 나타났으므로 의병전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외형으로 보아도 전쟁 형식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의병과 대적한 일본군의≪暴徒編冊≫이나≪朝鮮暴徒討伐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은 주권 의지와는 무관한 강점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의병전쟁은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항전이었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의병은 널리 알려져 있고, 그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도 많지는 않았지만 의병의 봉기가 있었다. 이러한 전통 위에서 1894년부터 의병전쟁이 전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침략자 일본을 야만인이라고 배척하며 싸웠다. 한국의 윤리와 문화를 항전의 정신적 지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 항전이요 도덕적 항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개인의 본능적 항전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침략자도 문화와 도덕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어느 것이 인류를 위하여 우월했던가는 아직도 대답이 없다. 다만 근대와 전근대의 잣대로 우열을 나누는 수가 있는데, 근대에는 발전근대와 수탈근대가 양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대가 인간주의를 상실하면 수탈근대로 전락하고 만다.
의병전쟁은 정의와 도덕과 문화를 명분으로 했다. 그러나 수탈 무기 앞에 패전을 거듭하고 말았다. 사람은 죽고 집은 불타고 국토는 황폐하게 되었다.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얻은 것은 정의를 지키는 전통이요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정신뿐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그 정의와 자유의 정신력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밑거름을 얻었고, 그것이 해방 후 민주화운동의 동력으로 이어져 현대사를 발전시킨 것이다.
453) | 趙東杰,<義兵戰爭과 3·1운동의 關係>(위의 책), 44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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