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주개혁의 좌절과 대한제국의 멸망
이상과 같이 근대 초기의 근대를 향한 초기적 변동과 함께 추진된 대원군의 개혁은 민비정권에 의하여 새로운 개혁으로 탈바꿈해 갔으나 만족스럽게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 위에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쟁이 심화되어 국왕과 정부측에서 시도하던 개혁이 방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때 혁명적 개혁을 지향한 개화당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정국을 일변하면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정변이나 개혁의 대중적 기반을 얻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대중적 힘의 공백을 외세의 힘을 빌려 추진하여 외세 각축장을 연출하고 말았다. 결국 1894년에는 이땅에서 청일전쟁을 맞아야 했다. 그러니까 자주 개혁이어야 할 근대적 개혁이 제국주의의 상처를 감수하며 추진되어야 했다. 따라서 자주성을 외면한 개화당의 개혁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대중은 별도로 민중적 결집을 이루게 되었다. 1860년대 이래 동학을 창시하고 삼남민란을 일으킨 民敎와 民亂 세력이 이필제란으로 합류를 시도하면서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해 갔다.
여기서 대한제국으로 국호까지 고치며 중흥을 도모하던 정부의 광무개혁사업이 다소의 진전을 보였고, 그때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인 광무개혁운동이나, 활빈당으로 정비되던 민중운동인 광무농민운동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 별도의 길을 갔다. 1900년을 전후하여 광무개혁사업과 광무개혁운동, 광무농민운동이 별도의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주 개혁의 노력이 역량의 분화로 벽에 부딪힌 안타까운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한 힘의 공백과 힘의 분산을 호기로 일본 제국주의가 침투하였다. 영·미 제국주의를 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1904년에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일의정서로 한국 지배를 강화해 갔다. 여기서 그때까지 자주 개혁으로 근대화를 도모하던 모든 세력이 구국전선을 형성했다. 광무황제를 중심으로 외교투쟁이 전개되었고, 활빈당 등의 광무농민운동은 그때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봉건 유림과 합류하여 의병전선을 형성하였고, 광무개혁운동을 추진하던 시민운동은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의병전쟁은 유림이 주도했던 민중이 주도했던, 그것은 전통시대의 역사적 역량의 결집이었고, 계몽운동은 그 동안에 성장한 근대적 역량의 결집현상이었다. 거기에서조차 전통과 근대가 역량의 분산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근대사의 한계라 하겠다. 그 분산의 통합은 독립운동 마당의 과제였다.
그와 같이 근대화를 추진했던 광무황제와 정부 관리나 혁명적 개화파정객이 제국주의 침략의 구조적 모순 탓이거나, 혹은 자신들의 역량 부족이었거나,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해 나라를 그르쳐 갔다. 광무황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 청일 양군의 횡포에 타격을 입고 불안에 빠졌으나 그래도 자신의 개화노선을 추구했다. 그런데 갑오왜란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면서 그는 공포 분위기에 빠지고 있었다.455) 동도서기 또는 구본신참을 표방하던 정부관리는 방향을 잃고 일신의 영달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개화정객들은 점점 친일에 빠지고 있었다.456) 결국 광무황제의 외교투쟁이나 계몽주의운동이나 의병전쟁이나 대한제국을 구하지 못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그해 8월의 한일신협약으로 지배를 구체화하면서 동해안의 독도를 점령하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7년 7월에 한일신협약으로 감독정치체제를 만들고 한국 군대까지 해산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협약도 아닌 己酉覺書로 한국의 경찰권을 빼앗고 1910년에 이르러 이른바 ‘일한병합’을 달성하여 대한제국은 그 이름조차 없어지고 1천3백만 명의 한국인은 나라를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