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계몽운동의 전개
계몽운동을 정확히 말하면 계몽주의운동이다. 계몽주의는 중세에서 근대로 발전할 때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문명 이론으로서 한국 계몽주의는 근대주의·사회진화론·국학 민족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 계몽주의 운동은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454) 1896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광무개혁운동의 부르주아 시민운동이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을 보면서 구국운동으로 발전한 것이 계몽주의운동이었다. 활빈당을 중심으로 한 광무농민운동이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것과 운동 곡선을 같이하고 있다.
계몽운동의 분야는 교육운동·언론운동·산업운동이었는데, 여성운동도 등장할 정도로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던 지식인의 부르주아 시민운동으로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초기 조직은 국민교육회와 대한자강회가 대표적이었다. 교육운동은 지방별로 나누어 전개되었는데 서우학회·한북학회·기호흥학회·호남학회·관동학회·교남교육회 등이 그것이었다. 언론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신문 잡지가 무수하게 간행되고 있었다. 그러한 교육과 언론에서 표방하는 것이 근대주의와 사회진화론과 국학 민족주의였다. 국학 민족주의는 국어·국사·국교운동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각급학교와 신문 잡지에서는 조선어·조선역사·대종교 등을 소개하기에 바빴다. 최광옥·주시경·김택영·현채·장지연·박은식·신채호·정인호·안종화·정교 등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계몽주의는 1907년 7월 망국사태를 당하여 좌우파로 분화되었다.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론과 온건론의 차이였다. 저항적 좌파는 공화주의를 표방하며 지하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어 저항하다가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였고, 온건적 우파는 보황주의(입헌군주제)를 표방하며 대한협회를 만들어 식민지하에서는 개량주의로 전락하거나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함께 사회진화론을 믿었지만 진화의 주체를 좌파는 민족으로, 우파는 국가로 보았다. 그러므로 민족의 진화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국가의 진화를 도모하다가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진화의 주체를 상실하고 친일파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 비하여 민족을 진화의 주체로 생각한 좌파는 나라는 망해도 민족의 진화를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이론을 가지고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에서 지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의 인도주의 이념에 젖으면서 사회진화론에서 탈피하였다.
454) | 계몽운동이라는 역사의 像을 최초로 역사 서술에서 부각시킨 것은 黃義敦,<光武 隆熙年代의 啓蒙運動>(≪新民≫14호, 1926년 6월호), 173쪽에서 비롯되었는데 해방 후에 孫晋泰,≪國史大要≫(을유문화사, 1948), 238쪽에서 ‘愛國 啓蒙運動’이라고 이름한 후에 애국계몽운동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계몽운동은 계몽주의 사상을 기초한 사회운동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애국계몽운동’이 아니라 ‘계몽운동’ 또는 ‘계몽주의운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계몽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근대 초기에 있었던 사상으로 공통된 것이 근대주의였다(趙東杰,<韓末 啓蒙主義의 思想構造와 독립운동상의 位置>,≪韓國民族主義의 성립과 獨立運動史 硏究≫, 지식산업사, 1989, 97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