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938년부터는 독립전쟁 시기였다.
독립전쟁기라고 한 것은 해외 독립군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을 전후하여 전반적으로 독립전쟁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부친 이름이다. 만주에서는 1936년에 조국광복회(전광·김일성)가 결성되고 중국 관내에서는 1938년에 민족혁명당을 중심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선의용대(김원봉)를 결성하였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이청천)를 조직하였다. 1939년에 공작대를 개편하여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조성환)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나월환)를 전선에 파견하였다. 식민통치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민총동원체제로 전환하는 것과 대비가 된다. 해방을 맞았을 때 독립군 조직은 중경에 본부를 둔 한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하바로프스크의 소련 국제군단인 88여단의 조선인부대가 있었는데 도합 1,500명 정도의 인력이었다.
국내에서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소작료통제령이나 임금통제령 등으로 전시파쇼가 강화되어 사회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일절 금지당한 암흑기를 맞았다. 그 속에서 학원을 중심으로 태극단·근목당·조선독립당·순국당·건국위원회·무궁단·백의동맹·화랑회 등, 소규모의 저항운동이 있었는데 성격을 보면 역시 독립군적 조직의 저항이었다.482) 194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까지 폐간하고 1942년에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식민지 조선인의 말과 글을 없애려고 했고, 민족동화를 막장에 이르러 민족말살정책으로 강행하여 각급학교에 식민교육을 강화했지만 그 암흑 속에서도 어린 학생의 독립군적 조직이 일어나고 있었다. 징용·징발·징병·보국대·여자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어가고, 소나무 뿌리까지 공출해 가던 야만적 압제 속에서도 한국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를 찾고 독립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소규모이지만 독립군적 조직을 일으켰다. 그와 같은 독립전쟁 상태에서 1945년 8월 15일을 맞았다.
482) | 趙東杰,<韓國近代學生運動組織의 성격 變化>(≪韓國近代民族主義運動硏究≫, 역사학회, 1987), 317쪽. ―――,<8·15직전의 독립운동과 그 試鍊>(≪韓國近現代史의 이해와 論理≫, 지식산업사, 1998), 17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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