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1930년대는 해외 독립군의 이동과 각종운동이 재정비된 시기이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설립하자 독립군은 중국군과 함께 반만항일전선을 형성하여 싸웠다. 1933년에 이르러 국민부의 조선혁명군과 한족연합회의 한국독립군의 주력이 항주·남경·낙양 등의 관내로 이동하여 만주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유격대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동북인민혁명군에 이어 동북항일연군으로 싸웠다.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도 1932년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항주로 옮긴 후 1940년 중경에 이르기까지 이동기를 맞았다. 만주에서 관내로 이동한 독립군은 낙양군관학교에서 특수교육을 마치고 후일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기간요원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정비작업이 있었다. 1929년 조선공산당 해체에 이어 1931년에는 신간회를 해체하고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 등의 대중운동이 파쇼정권에 대항하여 극단화되고 있었다. 거기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맞물려 계급혁명을 표방한 적색노농운동이 급부상하였다. 파쇼화의 우파적 극단과 계급혁명의 좌파적 극단이 사상계를 양극단으로 몰고갈 때 극단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보편 논리가 대두하였다.480)
1930년대 중반에는 민족주의가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조선학운동이 전개된 것이 특징중의 하나였다. 조선학운동은 丁茶山의≪與猶堂全書≫의 간행과 더불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481) 1935년에는 코민테른 7차대회가 열려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하여 민족주의가 새롭게 생기를 얻게 되었다. 그에 따라 만주에서 민생단사건이 종식되고 1936년에는 조국광복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1937년에 보천보전투로 이어져 군국주의 파쇼정권과 식민지 조선을 크게 자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