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선거에 의하여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헌법 전문에서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신생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정신을 선언하기는 했으나 임시정부에서 1923년에 불신임당하고 이어 1925년에 탄핵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김구를 중심으로 한국임시정부측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북협상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 이승만정부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남북 대립으로 착잡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한 혼탁정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승만정부는 독립운동 지도자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개혁정국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헌법 15조에서 “재산권은 보장된다. …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수정 자본주의의 길을 선언하고, 제84조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라고 복지국가 경제정책을 천명하고 있다. 그것을 위하여 농지개혁안을 만들어 1949년에 소작농을 금지하고 농지 소유를 3정보로 제한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것은 조봉암이 주도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6·25전쟁에서 북한의 오판을 만들어낸 남한의 농촌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남북문제를 국제적 냉전체제에 맞추어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를 위하여 정치기술·행정기술·사법기술·경찰기술이 우수하다고 해서 친일파를 등용하여 공산당 색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치적 비판자까지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고비에 오른 것이 1949년 6월사태였다. 국회 프락치사건에 이어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 조사위원회를 습격하여 악명 높은 친일파를 구제하고 6월 26일에는 백범 김구를 암살하였다. 여기서 이승만정권은 민족적 기반을 잃었다. 그후 독재는 강화되어 6·25전쟁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고 발췌 개헌안으로 다시 대통령에 취임하여 4사5입개헌안으로 종신 대통령을 꿈꾸면서 3·15부정선거를 자행하다가 4·19혁명을 맞아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489)
1946년에 북한 전역에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그때까지의 5도행정국과는 달리 프로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갖추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사회주의 정권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1948년에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즉각 1947년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그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러한 남북 정권의 출범을 세계사의 냉전구도로 보면, 남한은 미국의 첨병으로, 북한은 소련의 첨병으로 출발한 것이 된다. 그러한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 조국을 건설하지 못한 민족 역량의 한계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에 반하여 남북 정권은 경직성을 심화하면서 무력 통일을 외치고 있었다. 불원간 6·25전쟁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후 북쪽에서도 남로당(박헌영) 계열의 숙청과 독립동맹(김두봉) 계열의 숙청 등으로 독재가 강화되어 남북 정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489) | 이승만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1904년 미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청년시절에는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특히 배재학당의 학생운동과 1898년 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감옥에서 출옥한 후에 상동청년학원 원장으로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옥중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미국에 망명한 후에 안창호와의 불화, 박용만과의 충돌로 재미 동포사회가 분열하게 되었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1919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서는 재정과 외교를 독단하다가 국무총리 이동휘와 충돌하고 이어 안창호와 대립하여 1925년 탄핵까지 받게 되었다. 그를 끝까지 옹호하던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면서 신설된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45년 귀국하였다. 그런데 김구와도 정적이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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