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독무덤
독무덤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무덤쓰기의 한 방식으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독무덤은 사람의 주검을 흙으로 빚어 구운 용기에 넣어 매장한 것을 말하는데 대체로 일상용의 토기를 이용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널로 쓰기 위하여 특별히 제작한 경우도 없지 않다.
중국이나 일본열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독무덤이 쓰이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일부지역에 한정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의 독무덤은 지금까지 松菊里式土器 문화권 안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독무덤의 특징은 외독널로 송국리형토기를 2단으로 판 구덩이에 바르게 세워 묻고 위에는 판돌로 뚜껑을 덮었으며 토기의 바닥이나 몸통의 아랫부분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있다. 이러한 독무덤은 부여 송국리유적0759)을 비롯하여 공주 송학리·남산리,0760) 익산 석천리0761)·무형리,0762) 거창 대야리0763)유적 등지에서 조사되었다.
그런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면 외독으로 바르게 세워 묻는 형식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두 옆으로 뉘어 묻고 있으며 대부분 이음식독널이다. 이음식독널은 두 개의 독 아가리를 맞대거나 약간 끼워 넣은 전형적인 것과 주검을 넣은 으뜸옹(主甕)에 덮개로서의 막음용 토기로 결합된 合蓋式도 있고, 아가리를 판돌로 막은 외독무덤과 3개의 독을 이어 붙인 형식도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새로이 보이는 이음식독무덤은 청동기시대의 직립 외독무덤과는 전혀 다르므로 외부로부터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이 시대의 독무덤은 광주 신창동유적0764)과 같이 집단 독무덤유적도 있으나 대개 토광묘와 더불어 조사되고 있어서 토광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적도 토광묘가 많이 조사된 지역인 대동강유역이나 남부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옆으로 뉘어 묻은 새로운 형식의 이음식독무덤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0765)
이 시대의 독무덤으로는 황해도 신천 명사리0766)를 비롯하여 평양 호남리 남경,0767) 강서 태성리,0768) 은율 운성리,0769) 안악 복사리,0770) 광주 신창동, 삼천포 늑도,0771) 창원 다호리,0772) 김해 회현동0773)·지내동,0774) 부산 낙민동,0775) 경주 조양동,0776) 대구 팔달동0777)유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원삼국시대의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것은 초기 철기시대의 독무덤이 원삼국시대에도 그대로 계승 발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태성리나 조양동유적의 경우는 집단적인 토광묘유적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시대의 독무덤 가운데 김해 회현동 출토의 독널은 일본의 야요이독널(彌生甕棺)과 형태가 비슷하고 지내동 독무덤에 껴묻힌 토기도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토기와 유사하여 당시의 문화적 교류의 증거가 되고 있다.
0759) | 姜仁求 외,≪松菊里≫Ⅰ(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1979), 95∼9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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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0) | 姜仁求,≪百濟古墳硏究≫(一志社, 1977), 141∼143쪽. |
0761) | 國立全州博物館,≪展示圖錄≫(三和出版社, 1990). |
0762) | 國立中央博物館,≪韓國의 先·原史土器 特別展 圖錄≫(1993). |
0763) | 林孝澤 외,≪大也里住居址≫(東義大學 學術叢書 3, 1989), 115∼118쪽. |
0764) | 金元龍,≪新昌里甕棺墓地≫(서울大 考古人類學叢刊 1, 1964). |
0765) | 成洛俊,≪한국의 옹관묘≫(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도록, 1992). |
0766) | 도유호,<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독널에 대하여>(≪문화유산≫1962-3). |
0767) | 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
0768) | 전주농,<태성리저수지건설장에서 발견된 유적정리에 대한 개보>(≪문화유산≫1958-1).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5, 과학원출판사, 1959). |
0769) | 리순진,<운성리유적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
0770) | 도유호, 앞의 글. |
0771) | 申敬澈,<三千浦市 勒島遺蹟 第2次 發掘>(≪제10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韓國考古學會, 1986). |
0772) | 李健茂 외,<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Ⅰ)>(≪考古學誌≫1, 1989). ―――,<昌原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Ⅱ)>(≪考古學誌≫3, 1991). |
0773) | 榧本杜人,<金海 會峴里貝塚發見の甕棺に就いて>(≪考古學≫9-1, 1938). ――――,<金海貝塚の甕棺と箱式石棺>(≪考古學雜誌≫43-1, 1957). |
0774) | 沈奉謹,<金海 池內洞甕棺墓>(≪韓國考古學報≫12, 韓國考古學會, 1982). |
0775) | 藤田亮策,<東萊の甕棺出土>(≪靑丘學叢≫2, 1930). 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 |
0776) | 崔鐘奎,<朝陽洞土壙墓群4次發掘>(≪博物館新聞≫ 1982년 2월). ―――,<慶州市朝陽洞遺蹟發掘調査槪要とその成果>(≪古代文化≫35-8, 1983). 韓炳三,<原三國時代>(≪韓國の考古學≫, 講談社, 1989). |
0777) | 慶北大 博物館,≪原三國時代文物展≫(1990). 尹容鎭 외,≪大邱 八達洞遺蹟≫(慶北大 博物館叢書 18,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