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토광묘
土壙墓는 땅에 구덩을 파서 시체를 매장하는 간단한 방법이므로 통시대적이고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 철기문화가 전래되면서 철기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무덤쓰기는 토광묘이다. 그런데 토광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부시설인 나무널이나 덧널이 썩어 없어진 까닭에 처음에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토광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토광묘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내부시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까닭에 점차 구분하여 사용하는 추세에 있다. 즉 조사가 증가하면서 토광의 내부에서 나무널이나 덧널이 남아 있거나 또는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므로 널의 유무, 구덩이의 형태나 규모의 차이에 따라 시체를 직접 매장하는 구덩무덤(土葬墓 또는 土壙直葬墓)0778)과 나무널을 사용한 널무덤(土壙木棺墓) 및 나무덧널의 시설을 마련하여 매장한 덧널무덤(土壙木槨墓)0779)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0780) 따라서 여기에서도 내부시설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가) 구덩무덤
나무널을 쓰지 않고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매장한 것을 구덩무덤 또는 움무덤이라고 한다. 그런데 널을 쓰지 않은 구덩무덤과 널을 사용하였지만 흔적을 전혀 남기고 있지 않은 널무덤을 가려내기가 어려운 까닭에 구덩무덤으로 분류되는 유적 가운데는 널무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구덩무덤은 초기 철기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무덤쓰기는 아니다. 이전 시기인 청동기시대에도 일부에서는 구덩무덤을 썼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이 시대의 구덩무덤은 요동지방을 비롯하여 대동강·두만강·금강유역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요동지방의 유적으로는 錦西縣 烏金塘,0781) 旅大市 上馬石,0782) 朝陽 十二台營子,0783) 遼陽 二道河子,0784) 瀋陽 鄭家窪子 3지점0785)유적 등이 있는데 전형적인 요령식동검이 껴묻힌 경우는 드물고 변화된 요령식동검이 보다 많다. 대동강유역의 재령 고산리 구덩무덤에서도 변화된 요령식동검과 중국식동검 및 도끼가 출토되었다.0786) 두만강유역의 회령 남산리 구덩무덤유적에는 인골이 잘 남아 있었으며 대체로 길이 170∼180cm, 너비 50∼70cm의 규모이고 청동대롱옥과 함께 달도끼 등 각종 석기와 뼈송곳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0787) 금강유역인 공주 남산리에서도 송국리형토기를 사용하던 시기의 토광묘들이 조사되었는데0788) 이 가운데는 구덩무덤으로 볼 수 있는 크기가 작은 길이 150cm, 너비 45cm 이하의 단순 토광묘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구덩무덤은 매우 간단한 매장방법의 하나인 까닭에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서도 널무덤이나 덧널무덤과 더불어 여전히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이 구덩무덤으로부터 파생하여 발전한 까닭에 구덩무덤은 규모나 껴묻거리에서 매우 열악함을 보여준다.
나) 널무덤
널무덤(土壙木棺墓)은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 일반적인 묘제로 자리잡은 뒤 보다 발전된 덧널무덤에 그 중심적 위치를 넘겨주었다. 널무덤은 한국식동검문화와 관계가 깊은데 서북한지역에서는 대부분 산기슭 언덕 끝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안치한 뒤 널의 안팎에 껴묻거리를 넣은 형식이다. 껴묻거리는 처음에는 한국식동검·조각칼·잔무늬거울 등이 조합을 이루고 철기는 보이지 않으나 점차 거울이 없어지고 동검·꺾창 등의 청동기와 함께 주조된 쇠도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동검·투겁창 등 청동기는 줄어들고 쇠도끼·쇠끌·쇠낫·쇠투겁창 등 단조된 철기가 많아지면서 화분형토기나 회색단지가 조합을 이루게 된다.0789) 널무덤은 구덩이의 평면이 장방형이며 네벽을 수직 또는 약간 경사지게 1단으로만 판 것과 구덩이에 단을 지워 세장하게 2단으로 판 것이 있다.
한편 껴묻거리의 변화는 구덩무덤에서 널무덤으로 다시 덧널무덤으로 발전하는 것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시기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태성리유적0790)이다. 청동기만이 출토된 유적으로는 대동군 반천리,0791) 연안 오현리유적0792)을 들 수 있고, 청동기와 함께 쇠도끼가 조합을 이룬 유적으로는 배천 석산리유적0793)과 정백동유적을 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널무덤으로 철기가 반출되지 않거나 철기로서 주조된 쇠도끼 등이 조합을 이룬 유적은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도 조사되고 있다. 함남 신창 하세동리, 영흥 용산리,0794) 강원도 문천 남창리,0795) 공주 봉안리, 익산 평장리0796) 유적에는 철기가 보이지 않으며 함흥 이화동유적0797)은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쇠도끼 등 철기가 약간 섞인 널무덤인데 나무널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한국식동검·꺾창·투겁창·잔무늬거울 등 청동기와 함께 쇠도끼가 조합을 이루고 있다. 서북한지역에서 청동기가 중심을 이루고 약간의 철기가 껴묻힌 널무덤보다는 강철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기본으로 하는 널무덤이 훨씬 많고 군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으로는 부덕리 수역동·낙랑구역·태성리·운성리·안악 복사리 망암동 등이 있다. 이들 유적 가운데는 널이 하나만 있지 않고 합장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다. 태성리 7·10·12·13호와 운성리 5호, 복사리 3호 등이 이에 속한다.0798)
이러한 널무덤이 서북한지역에서는 보다 일찍 덧널로 발전하였으나 남부지방에서는 다소 늦게 원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덧널무덤으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남부지방에서는 전형적인 널무덤이 철기가 본격적으로 퍼지는 단계에서 일반화되는데 청동기와 철기가 공반되는 널무덤은 경상도지역에서 주로 조사되었다. 경주 조양동0799)·구정동,0800) 월성 입실리, 영천 어은동,0801) 대구 평리동0802)·신천동0803)·비산동,0804) 창원 다호리유적(<그림 3>)0805)이 여기에 해당된다.
널무덤은 거의 대부분 나무널이 썩어 없어진 상태로 조사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 사용된 널의 구체적인 형태나 결구방법에 대하여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서북한지역에서는 대체로 판자로 짜맞춘 널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남부지방에서도 그러한 널이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조사된 유적이 없어 의문시된다. 다호리유적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널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었다.
다) 덧널무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덧널무덤(土壙木槨墓)은 지금까지 남부지방에서는 조사되지 않고 있으며 주로 대동강유역에서 조사되었다. 남부지방에서는 원삼국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덧널무덤이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며0806) 그러한 유적으로는 경주 조양동·황성동을 비롯하여 울산 하대·중산리, 부산 노포동, 김해 양동·대성동, 창원 도계동유적 등이 있다. 이러한 덧널무덤은 중국을 비롯한 고대 북아시아에서 널리 유행했던 목곽분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대동강유역에 먼저 들어와 위만조선의 유력자의 무덤으로 만들어지다가 점차 전국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대동강유역으로 들어온 덧널무덤은 위만조선이 망하고 漢의 郡縣으로 樂浪郡이 설치된 후에도 계속하여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변동은 덧널의 구조 변화를 가져오고 껴묻힌 각종의 유물 조합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서북한지역의 덧널무덤은 홑무덤(單葬墓)과 어울무덤(合葬墓)의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홑무덤은 먼저 장방형의 구덩을 파고 두꺼운 나무판자나 角材로 곽을 짜고 그 안에 하나의 나무널을 넣은 후 판자나 각재의 뚜껑을 덮은 다음 흙을 쌓았다(<그림 4>). 대동강유역에서 조사된 홑무덤은 60기 정도이며 대부분 봉토가 없어졌다. 그러나 은율 운성리 9호분과 같은 경우는 밑변 18m, 높이 2.5m 정도의 방대형 봉토가 남아 있고 봉토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유적도 상당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지하에 매장시설을 갖춘 다음 봉토를 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홑무덤의 덧널 가운데는 널안에 껴묻거리를 넣기도 하지만 따로 껴묻거리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어울무덤은 하나의 봉토안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덧널이 들어있는 것(<그림 5>)과 하나의 덧널안에 두 개 이상의 널을 넣은 것이 있다. 그 가운데 덧널을 따로 가지고 있는 어울무덤은 덧널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경우는 북쪽, 동서인 경우는 서쪽의 덧널에 남자가 묻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두 덧널은 대체로 깊이가 같지 않으며 여자쪽이 한 단 깊게 놓여있다.0807) 이러한 덧널안에 하나의 널이 들어 있는 것과는 달리 하나의 덧널안에 두 개 이상의 널을 넣은 어울무덤은 귀틀무덤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낙랑군의 설치 이후에 등장하며 樂浪 前期의 무덤양식이다. 귀틀무덤은 지하에 판 구덩이 안에 나무각재로 네모난 방모양의 바깥덧널을 짜고 그 안에는 다시 나무벽을 세워 안덧널을 구획한 다음 그 안에 북침의 부부나 가족의 널을 넣고 있다(<그림 6>).0808)
대동강유역의 덧널무덤은 매우 한정된 지역에만 분포하고 있다. 유적이 조사된 곳은 평양 정백동·정오동·토성동·용추동·만경대리·용산리, 강서 태성리, 대동군 팔청리·상리, 온천군 성현리, 황주군 순천리·천주리·청룡리, 은파군 갈현리, 봉산군 송산리, 서흥군 문무리, 은율군 운성리, 안악군 복사리, 신천군 청산리, 재령군 부덕리유적 등으로 청천강 이남의 서북지방이다.
덧널무덤의 껴묻거리는 한국식동검이나 투겁창 등의 청동기가 약간 섞여있기는 하지만 무기나 농공구 등의 철기가 주종을 이루며 마구나 수레부속 및 화분형단지, 삿무늬단지 등이 공반되고 있는데 유물 조합상의 차이에서 시기적 선후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무기 중의 한국식동검, 쇠단검, 고리자루칼, 쇠장검 등 검의 변화이다. 덧널무덤의 껴묻거리는 이른 시기에는 청동기를 공반하는 널무덤의 그것과 비슷하나 시기가 지나면서 귀틀무덤의 그것과 같은 것이 많다. 이른 시기는 부덕리, 정백동 96호분이, 늦은 시기는 정백동 80·81, 태성리 6호분이 대표적인 유적이다.0809)
덧널무덤은 덧널의 크기나 구조, 껴묻거리의 종류와 수량에서 여러 단계의 차이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묻힌 사람의 신분이나 계급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덧널무덤으로서 가장 큰 규모를 가졌고 화려하고 풍부한 유물이 출토된 유적으로는 정백동 37호분을 꼽을 수 있다.
귀틀무덤의 껴묻거리는 팔찌·반지·띠고리와 같은 장신구, 쇠장검·노기·쇠극 등의 무기, 중국거울, 청동그릇, 칠기, 토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칠기에는 중국 한대의 연호나 만든 장소와 사람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따라서 귀틀무덤에 이르게 되면 중국의 漢式遺物이 중심을 이룬 가운데 토착적인 유물이 포함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귀틀무덤의 유물 가운데는 기원전 85년에서 기원후 71년 사이의 연대를 나타내는 자료들이 있어 축조연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도장도 출토되고 있는데 ‘高常賢’·‘周固’·‘王光’ 등과 같이 묻힌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私印이나, ‘夫租長’·‘樂浪太守’ 등의 官印이 있다. 도장은 대부분 귀틀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으나 덧널무덤에서도 ‘夫租薉君’이라는 도장이 출토된 바 있다.
<成洛俊>
0778) | 土壙墓를 북한에서는 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데 나무널의 사용 유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남한에서는 널을 쓰지 않은 단순 토광묘를 구덩무덤으로, 나무널을 사용한 경우에는 널무덤으로 구분해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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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9) | 북한에서는 土壙木槨墓를 나무곽움무덤 또는 나무곽무덤으로 부르고 있다. |
0780) | 李南珪,<西北韓 土壙墓의 性格>(≪韓國考古學報≫20, 1987). |
0781) | 錦州市博物館,<遼寧錦西縣烏金塘東周墓調査記>(≪考古≫1960-5, 科學出版社). |
0782) | 遼寧省博物館,<遼寧長海縣上馬石靑銅時代墓葬>(≪考古≫1982-6). |
0783) | 朱 貴,<朝陽十二台營子靑銅短劍墓>(≪考古學報≫1960-1). 金元龍,<十二台營子의 靑銅短劍墓>(≪歷史學報≫16, 1961). |
0784) | 遼陽市文物管理所,<遼陽二道河子石棺墓>(≪考古≫1975-5). |
0785)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조선유적유물도감≫2;고조선·부여·진국편(1989). |
0786) | 황기덕,<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고고학자료집≫4, 1974). |
0787) | 박광훈,<회령군 남산리 움무덤 발굴중간보고>(≪조선고고연구≫1989-2, 사회과학출판사). |
0788) | 尹武炳,<公州郡 灘川面 南山里 先史墳墓群>(≪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
0789) | 李健茂, 앞의 글(1990a), 240∼242쪽. |
0790) | 전주농, 앞의 글.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앞의 책. |
0791) | 梅原末治·藤田亮策, 앞의 책. |
0792) | 리규태,<평양부근과 황해남북도일대에서 알려진 좁은놋단검관계유물>(≪고고학자료집≫6, 1983). |
0793) | 황기덕, 앞의 글. |
0794) | 박진욱,<함경남도일대의 고대유적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
0795) | 원산역사박물관,<문천군 남창리 움무덤>(≪고고학자료집≫6, 1983). |
0796) | 國立中央博物館·國立光州博物館,≪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汎友社, 1992). |
0797) | 박진욱, 앞의 글. |
0798) | 황기덕 외,<기원전 5세기∼기원 3세기 서북조선의 문화>(≪고고민속론문집≫3, 사회과학원출판사, 1971). |
0799) | 한병삼,<慶州 朝陽洞古墳發掘의 意義>(≪韓國考古學年報≫7, 1980). |
0800) | 金元龍,<慶州九政里出土金石倂用器遺物에 對하여>(≪歷史學報≫1, 1952). |
0801) | 朝鮮總督府,≪大正十一年度古蹟調査報告≫2(1925). |
0802) | 尹容鎭,<韓國靑銅器文化硏究>(≪韓國考古學報≫10·11, 1982). |
0803) | 尹容鎭,≪慶北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1(1980). |
0804) | 金元龍,<鳥形안테나式 細形銅劍의 硏究>(≪白山學報≫8, 1970). |
0805) | 李健茂 외, 앞의 글. |
0806) | 林孝澤,<洛東江 下流域 土壙木棺墓의 登場과 發展>(≪三韓社會와 考古學≫제1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1993). |
0807) | 리순진,<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나무곽무덤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8, 1983). |
0808) | 金元龍, 앞의 책(1973). |
0809) | 리순진, 앞의 글(1983). 황기덕 외, 앞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