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축국
축국은 가죽주머니로 공을 만들거나 털 또는 공기를 넣어 발로 차는 오늘날의 축구와 유사한 놀이이다.668)≪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午忌日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는데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 그 소매를 찢었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
이와 비슷한 기사가≪三國史記≫ 김유신전에도 실려 있어 삼국시대에 이미 축국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당시의 축국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공을 차고 놀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축국하는 장소로 ‘유신의 집 앞’이라 하였으니 따로이 축국을 위한 운동장의 시설이 없었던 것 같다. 축국은 중국에서 전래되었으며 한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일본에서는 축국의 공을 ‘마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한국어의 머리(頭)가 전화된 것이다.
일본에서의 축국은 7세기 중엽에 이미 그 기록이 보이는데, 그 방법은 공을 4∼8명이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차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제기차기와 흡사하다.
앞에서 예를 든 중국의 역사서에서 조차 당시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축국에 능하다고 한 기록들로 보아 그 때 이미 축국은 사회체육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668) | 羅絢成,≪韓國遊戱史硏究≫(百祥文化社, 1977), 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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