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곡예
통치기구가 정비됨에 따라 사회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생산활동과 직접 관계가 없는 전문가가 탄생된다. 曲藝란 특별한 훈련으로 몸에 체득한 뛰어난 기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인간과 대가를 지불하고 이것을 즐기는 구경꾼의 존재에 의해 성립되는 놀이를 말한다.
삼국시대의 곡예는 동물을 이용한 馬戱와 사람이 직접 여러 가지 용구를 이용하여 행하는 재주부림이 있었다. 마희에 관한 기록은≪삼국사기≫居道傳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매년 한 차례씩 張吐의 들판에 말을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타고 달리게 하여 놀고 즐기게 하였다. 그 때의 사람들이 이를 馬叔이라 불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道).
이 馬叔이 같은 곳에 수록된 異斯夫傳에는 “馬戱로써 加耶를 속여 취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마숙은 말과 사람이 함께 행하는 즐거운 놀이이며 구경꺼리가 될 수 있는 일종의 쇼스포츠(show sports)라고 볼 수 있다. 于尸山
國과 居柒山國의 국민들이 이 놀이를 구경하느라 전혀 방비가 없어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구경에 몰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마숙이 사람의 시선을 끄는 曲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마숙이 뒤에 마희라는 명칭으로 불렀을 때에는 아마 더욱 체계화된 곡마가 되었을 것이지만 그 곡마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사람이 직접 행하는 곡예의 자료로는 고구려의 八淸里 고분벽화, 藥水里 고분벽화, 修山里 고분벽화 등을 들 수 있다. 팔청리의 곡예도는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鼓吹樂隊의 반주에 맞추어 곡예를 연출하는 그림이다. 곡예사 4명은 구경하고 있는 주인공을 향해 재주를 부리고 있다. 주인공 앞에는 긴 나무다리(竹馬) 위에서 춤추는 곡예사가 있으며 그 뒤의 발 밑에서는 비파를 뜯고 있는 악사가 있다. 바로 그 뒤에 3개의 짧은 木棒과 5개의 고리를 교대로 던져 올리고 있는 곡예사가 보인다. 그 윗쪽에는 오른손에 장검을 들고 허리를 낮추어 擊劒의 자세를 한 곡예사가 있다. 곡예사들은 얼굴에 둥글게 연지를 칠하고 있다. 얼굴에 연지를 찍은 것은 고분벽화에 보이는 무용수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 7>의 행렬도는 약수리 고분벽화의 하나이다. 행렬도는 주인공이 탄 마차를 중심으로 3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의 바로 앞에서 3명의 곡예사가 재주를 부리고 있다.
수산리 고분벽화에 보이는 곡예도는 주인공 부부가 시종을 이끌고 곡예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길다란 죽마 위에서 재주를 피우는 곡예사, 그 밑에서 5개의 고리와 3개의 단봉을 두 손으로 던져 올리고 있는 곡예사, 허리를 약간 앞으로 굽힌 채 두 손으로 마차바퀴 모양의 고리를 높이 던져 올리고 있는 곡예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손과 발의 곡예는 다양한 고구려 곡예의 일단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기발하고도 낙천적인 고구려인들의 생활감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동물을 이용하지 않고 손과 발로 행하는 곡예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으로부터 전파되어 이미 기원전 1000년쯤에는 중국에서 雜戱 혹은 百戱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 곡예 중에는 줄타기·竹馬·弄丸·倒立 등이 있었다. 일찍부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고구려인들에게 곡예는 지배계층의 구경거리로, 피지배계층의 경제수단으로서의 의미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체육은 무예를 중심으로 한 국방체육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활쏘기는 청소년들이 교육을 위한 중요과목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각종의 민속놀이가 체계화되어 실시되고 있었다.
<李鎭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