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농업생산력의 발전문제
한 사회의 생산력은 생산관계 및 사회구성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회의 변동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일어난다. 고려시대의 연구에 있어 당시 사회의 성격이나 정치, 사회 변동 및 농민항쟁의 동력 등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사회적 생산력 수준을 밝히는 것이 선결과제라 할 수 있다.
전근대사회였던 고려의 생산력의 토대는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므로 농업 생산력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파종 방식이나 시비기술·관개기술·품종개량 등의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실태, 당시의 생산력의 수준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지표로서의 결부제도의 변천 등이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절대적인 사료의 부족, 특히 농서의 부재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경지이용 방식을 둘러 싼 제논의0943)와 결부제도에 대한 몇 편의 논고0944)만이 있을 뿐, 그 밖의 연구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0945) 그러나 경지이용 방식에 대한 논의만 하더라도 논자에 따라 휴한단계로 보느냐 상경단계로 보느냐에 따라서 토지소유 내지 농민의 존재 양태를 파악하는 방식이 다르고 더 나아가 이것이 시대구분과도 직결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다.0946) 그러므로 경지이용 방식 뿐 아니라 농업기술이나 농기구, 결부제도 등에 대한 제반 연구가 뒤따라야만 고려시대상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농업기술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고려시대의 농법단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논란이 되어 왔던 부분은 다음의 사료이다.
① 무릇 전품은 不易之地를 上으로, 一易之地를 中으로, 再易之地를 下로 한다. 그 不易山田 1결은 平田 1결에 준하게 하고 一易田 2결은 평전 1결에 준하게 하고 再易田 3결은 평전 1결에 준하게 한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經理 문종 8년 3월).
즉 사료 ①에 의거하여 고려시대의 모든 전품규정은 歲易의 빈도에 따라구분되므로 고려시대에는 휴한법이 일반적이었다는 견해와 사료 ①은 山田규정에 해당되므로 平田은 상경단계이었다는 견해가 대립되어 왔었다.0947) 그러나 경지이용 방식만을 가지고 당시의 농법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水·旱田 등에 있어 어떠한 작법이 시행되었느냐를 밝히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水田의 경우 歲易法을 휴한법으로 파악하는 중요한 논거는 중국 고대 기록인≪周禮≫地官 稻人條와 그것에 대한 後漢代의 鄭玄의 註, 그리고≪齊民要術≫,≪四時纂要≫등의 농서에 수록된 도작법이 기본적으로 1년휴한법이라는데 착안하여 중국과 비교해서 고려시대도 역시 휴한법 단계라는 것이었다.0948) 그러나 중국고대의 수도작법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크게 휴한법설과0949) 작물교대설로 대립되어 있다.0950)
그런데 중국 고대 稻作法을 이해하는 데 있어 특히 논란이 되어 왔던 부분은 6세기≪제민요술≫의 다음 기록이다.
② 稻는 所緣이 없고 다만 歲易하는 것이 좋다. 토지를 선택할 때는 상류에 가까운 곳이 좋다[물이 맑으면 稻의 질이 좋다.토지의 비척과는 관계가 없다.] (≪濟民要術≫권 2, 水稻).
휴한법설에서는 사료 ②에서의 緣을 토지의 비옥도로 보고 稻는 토지의 良薄에 관계없이 세역하는 것이 좋다로 해석하여 1년휴한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0951) 반면 작물교대설에서는 緣을 底로 해석하여 도는 어떠한 작물의 底라도 좋은데 단지 연작을 피하는 것이 좋다로 보고 세역이 작물교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0952) 그렇다면 중국 고대농법에 견주어 고려시대를 휴한단계라고 주장하는 논자의 입장은 위의 두 견해 가운데 전자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하겠다.
그러나≪農桑輯要≫를 발췌, 번역하여 조선에서 1517년에 간행된≪農書輯要≫중의 다음 기록은 휴한법설을 재고하게 한다.
③≪齊民要術≫에 의하면 稻는 所緣이 없고 단지 歲易하는 것이 좋다. 땅을 선택할 때에는 상류에 가까운 곳이 좋다. 3월에 파종하는 것이 上時이고 4월 상순이 中時, 중순이 下時이다. …둑에 가까운 田地는 혹은 田 혹은 畓으로 서로 바꾸어 경작한다. 地品을 헤아려 한결같은 전지는 매년 回換하여 水稻를 경작하되 3월 내 耕種하지 않으면 4월 상중순을 어기지 않고 耕種한다(≪農書輯要≫水稻).
즉≪농서집요≫의 찬자는≪제민요술≫의 세역농법을 裸地休閑法이 아니라 전과 답을 해마다 바꾸는 輸沓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역농법은 휴한법설보다는 작물교대설 쪽이 더 실체에 가깝다 하겠다.0953)
이러한 작법이 실제로 일제시대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행해졌던 예가 있는 것을0954) 보면 그 이전의 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광범위하게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고려시대의 수도작법을 휴한법으로 상정하여 일반적 농지 이용 방식이 휴한단계였다고 하는 견해는 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 전근대농업사에서 旱田 농업이 가지는 비중이 水田농업에 비해 월등했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다.0955) 그렇다면 마땅히 고려시대의 경지 이용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한전농법이 어떠했나 하는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수전농법에 대해서도 고려시대의 사료보다는 중국 농서나 조선시대 농서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듯이 한전농법에 관해서도 고려시대의 사료만으로는 명백히 밝히기가 곤란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중국의 농법과 조선 초의 농법을 통해 비교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중국농업사에서는 華北 旱地 농법에서 언제 윤작체계가 성립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0956) 이들 논자들은 대체로≪제민요술≫단계는 1년 1작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2년 3작의 윤작체계는 小麥粉食과 碾磑 경영의 유행을 근거로 하여 당나라 중기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0957)≪제민요술≫단계는 粟種의 다양화에 힘입어 2년 3모작의 조건이 갖추어지고 늦어도 수·당대에는 2년 3작이 실현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0958)
여기에 반해 이미 전국시대 말엽에 2년 3모작이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있고,0959) 전한대까지는 1년 1작이 일반적이나 후한대에는 禾-麥 윤작체계가 성립되며≪제민요술≫단계는 벼-보리 윤작 혹은 벼-보리-콩의 2년 3작이 실현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0960)
여러 가지 견해를 종합해 살펴 보면 결국 최소한 당나라 때에는 2년 3모작의 윤작체계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0961)
한편 조선의 경우를 살펴 보면 15세기≪農事直說≫에는 이미 한전에서 보리를 중심으로 하는 1년 2모의 윤작체계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0962) 윤작 방법으로서는 根耕法과 間種法을 들고 있으나 간종법(전후작물을 일정기간 동안 동일 포장에서 동시 재배하는 법)은「田少者」들에게 권하는 특수농법이었던 것 같고, 주로 근경법(동일 포장에 전후작물을 연작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농사직설≫에서 볼 수 있는 그루갈이(根耕法)에 의한 윤작체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麥 → 靑梁[種黍粟條:조에는 또 늦게 심어 일찍 익는 청량조와 같은 것이 있다. 깊고 오래 묵은 땅을 택하여 파종한다. 나무숲을 베어 낸 곳이 으뜸이고, 오래 묵은 밭이 다음이며, 보리그루는 그 다음이다].
麥 → 大小豆[種大豆小豆條:콩과 팥은 모두 旱種과 晩種이 있다. 早種은 鄕名으로 봄갈이, 晩種은 鄕名으로 그루갈이라고 한다. 그루갈이는 보리와 밀을 베어내고 그 뿌리를 가는 것이다].
麥 → 羌稷[種稷條:피에도 늦게 심고 일찍 익는 것이 있다(鄕名으로 강피). 보리와 밀을 베어 내고 그루갈이한 후 6월 상순에 파종한다].
麥 → 胡麻[種胡麻條:만약 熟田이면 4월 상순, 보리그루면 보리를 베어낸 후 바로 糞灰와 섞어 드물게 파종한다].
黍, 豆, 粟, 木麥 → 麥[種大小麥條:기장, 콩, 조, 메밀그루밭은 미리 곡식을 거두기 전에 자루가 긴 낫으로 풀이 아직 누렇게 되지 않아서 베어 밭두둑에 쌓아 두었다가 곡식을 거둔 후 그 풀을 밭 위에 두텁게 펴서 불태우고 擲種한다. 재가 흩어지기 전에 간다].
이러한 농서 상에 나타나는 윤작농법이 현실적으로 시행되었음은 태종 연간에 보리밭에 대한 收稅를 1년에 두 번 할 것을 거론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0963)
이렇게 볼 때 중국과 조선을 비교하여 유추하면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주곡을 중심으로 1년 1작은 확립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성종 11년의 공전에 대한 수·한전의 수조규정은 비척도에 따라 地品을 상·중·하로 나누어 실시하고 있는데0964) 이 규정으로 본다면 수·한전 모두에서 1년 1작을 원칙으로 한 수조규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한전에서 윤작체계가 일반적으로 확립되었다면0965) 수조규정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것이나 고려시대의 어떠한 기록에도 그러한 사료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수·한전 모두에서 1년 1작을 원칙으로 하는 연작법이 행해졌다고 한다면 아울러 그것을 뒷받침할 농기구나 시비 기술 등의 발전 정도는 어떠했나 하는 것이 병행되어 검토되어야 하겠다.
우리 나라 농업이 牛犁耕 단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역사가 대단히 오래되었다.0966) 고려시대에도 籍田 경작에 쟁기가 동원되고 있는 것을 보면0967) 우려경은 이미 일반화된 관행으로 상당 정도의 발전을 예상케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실물쟁기는 물론 쟁기의 구조를 설명한 어떤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시대 쟁기의 성격을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쟁기에 대해 어느 정도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0968) 이에 따르면≪농사직설≫단계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아직까지 秋耕(深耕)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태이고 犁耕法이 쟁기의 왕복경으로 이랑을 만드는 畦立耕을 특징으로 하는 이 당시에는 淺耕에 의한 平畦耕단계이므로 쟁기는 無鐴犁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有鐴犁로 이행하여 심경에 의한 高畦耕法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무벽려(볏이 없는 쟁기)에서 유벽려(볏이 있는 쟁기)로의 이행은 볏밥의 반전을 보다 용이하게 하고 거듭 反耕함으로써 精耕細作을 가능케 하여 토지 지배력을 증대시켜 2년 4작, 2년 3작이라는 윤작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나아가서는 花·南草 등 경제작물의 재배, 廣作 경영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16세기 말의 농업현실을 담고 있다고 보이는≪農家月令≫에 유벽려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여 16세기까지 유벽려의 존재를 올려 보고 있다.0969)
여기에 반해 이미≪농사직설≫에 수전 뿐 아니라 한전 작물 중 기장·조·콩 등에는 추경이 행해지고 있었으므로 이 시대에 유벽려가 존재했다는 견해가 있으며,0970) 이에 대해 자료에 볏받침이 없다 해서 반드시 볏을 쓰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반론이 있었다.0971)
중국 농업사에서는 쟁기에 있어 鐴과 床의 유무는 바로 휴한농법에서 경지 전면경을 통한 연작농법으로의 이행이 달려 있는 문제였다. 화북농업에서는 前漢 말≪氾勝之書≫단계에 有鐴有床의 長床犁가 나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0972)
화북보다 기후 조건상 건조하지 않고 또 토양 저항력에 있어서는 훨씬 강한 한국의 농업현실에 바로 중국 농법수준을 대입할 수는 없으나 어차피 화북농업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던 한국의 입장으로 볼 때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0973) 8세기 경의 것인 실물쟁기(실제로 사용된 것이 아닌 의례용)로 正倉院에 ‘子日手辛鋤’라는 無鐴無床犁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동시대의 문헌자료상에는 유벽려도 존재했던 것으로 나와 무벽·유벽 두 계통의 쟁기가 모두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두 계통의 쟁기가 모두 한국에서 건너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 10세기 이후에는 有鐴有床犁가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농기구사에서는 심경과 관련하여 쟁기 의 구조상에 있어서 벽의 유무보다는 상의 유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한국과 다른 일본의 토양조건 때문일 것이다.
각 지역의 기후나 토양조건 그리고 耕法의 발전, 전개에 따라 쟁기는 각자 다른 특성을 보이며 발전해 나갔겠지만, 동시대의 중국이나 일본에서 다 같이 보이고 있는 유벽유상려가 한국에만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상의 경우 중국의 화북지방에서처럼 건조가 심하지 않고 따라서 保水문제가 화북에 비해 덜 심각했던 한국에서는 상이 발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벽은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서긍은≪高麗圖經≫에서 고려의 농기구가 송대와 비슷하다고 하고 있다.0974) 그의 농기구에 대한 인식 정도를 어느 만큼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쟁기와 같이 눈에 드러나는 농기구가 달랐다면 분명히 어떤 지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作條犁인 무벽려도 있었겠지만 경지의 全面 反轉을 가능하게 했던 유벽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④ 바라보니 들은 하늘을 연한 듯하고,
마을의 밭갈이는 땅 깊숙히 파헤쳤네.
땅이 낮으니 윤기가 흐르고,
산이 가까우니 찬 기운이 침입하네.
오래된 벽에는 흙비가 묻어 있고,
말라 죽은 楠木 속은 좀 슬었네.
내 시에 예언이 있어,
관직에서 파면되어 과연 다시 찾는구나.
(≪東國李相國集≫권 17, 古得詩, 15일에 皇恩을 입고 고향 黃驢縣에 量移되었다. 21일에 竹州에 이르러 萬善寺에 묵으면서 板上請公의 시에 차운함)
⑤ 해 떨어진 낮은 고개에,
외로운 구름이 遠村을 가리웠네.
새는 샘물을 찾아 마시고,
소는 땅을 밟으며 지표를 뒤집네.
(≪東國李相國集≫권 17, 古律詩, 住老賢上人이 過客諸公의 시를 걸어 놓고 나에게 차운을 청함)
사료 ④는 李奎報가 猬島로 유배되었다가 고종 18년(1231) 정월에 고향인 黃驪縣으로 돌아온 후에 쓴 시이다.0975) “마을의 밭갈이는 땅 깊숙히 파헤쳤네”라는 구절은 심경되어 있는 전지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고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 ⑤에서는 소가 논밭을 飜耕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번경은 즉 전면 반전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의 사료이기는 하지만 심경이나 번경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유벽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유벽려에 의한 耕地法은 고려시대의 연작법 달성을 가능케 해 준 요인이었다.
다음으로는 제초기구인 鋤(호미)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겠다. 세계의 농경지대를 건조도와 강우량을 중심으로 고찰한 연구성과에 의하면,0976) 한국의 경우는 中耕(사이갈이) 除草를 하지 않으면 잡초 때문에 수확이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지역에 속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에 속한 농경지대에서는 제초기구가 대단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의 제초용구로서 특징적인 것이 바로 호미이다.0977)
이 호미에 대하여≪林園十六志≫,≪課農小抄≫,≪北學議≫등 조선 후기의 호미에 대한 기록에 근거하여 이를 王禎의≪農書≫와 비교하여,≪農事直說≫단계에는 春鋤法은 短柄鋤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 전기에도 단병서가 널리 이용되고 있음을 밝힌 견해가 있다.0978) 또≪농사직설≫농업의 노동집약적인 특성을 호미를 사용하는 제초작업에서 찾으면서, 당시의 호미는 長柄鋤가 아닌 조선 독자의 단병서라고 한 견해도 있다.0979) 이에 반해 고려시대는 물론이요 조선 전기까지도 장병서가 일반적이어서 농업경영에서는 단병서 이용에 의한 집약 경영이 아닌 粗放的 경영이 영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0980)
당시의 실물 호미가 발견되지 않는 한 문헌자료에 의거한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호미는 아니지만 8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미가 유일하게 雁鴨池에서 출토되었다.0981) 이 호미는 전체 길이 16.7㎝, 날 최대너비 4.5㎝로 지금 흔히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호미와는 다른 낫형의 소형 호미이다.0982) 앞으로 농기구 발굴 결과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 농업의 특색이 중경제초에 있다고 한다면, 한국의 특징적인 제초용구로 지적되는 호미가 언제 기원하고 언제부터 광범히 이용되었나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가장 많은 농기구 출토 사례 중의 하나가 5세기 신라왕족의 묘로 알려진 경주 황남동 98호 남분이다.0983) 여기에는 쇠도끼 380개, 쇠보습날 14개, 쇠스 랑 20개 등이 부장되어 출토되었다. 쇠도끼는 논자에 따라 쇠괭이로 파악하기도 하는데,0984) 이렇게 많은 농기구가 부장되었으면서도 호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 이 당시에는 아직도 제초용구로서 낫이나, 장병서의 대용인 쇠괭이 등을 사용하는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신라·백제에서는 5·6세기 무렵에 수리사업에 관한 기록이 집중되며,0985) 또 신라에서는 智證王 3년(502)에 牛耕을 처음 시작했다는 기록0986)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사에서 5·6세기 무렵은 농업생산력 발전에 있어 획기를 이루는 시기였다 하겠다. 그와 더불어 잡곡농사 중심의 전통적인 음력 5월·10월의 농경축제 이외에 5∼7세기 경 신라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8월 한가위가 새로운 명절로 떠오르게 되는데,0987) 이것은 점차 벼농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농작기술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전이 예상되는데 한국의 독자적인 소형 호미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안압지 출토 호미는 낫형으로 경상남도·제주도·전라남도 도서지방 및 산간부락 등의 자갈이 많은 지대에서 쓰이고 있는 낫형 호미와 유사하며,0988) 북한의 대동강 이북·청천강 이남 등에서 사용되는 베루개나 날호미와도 모양이 유사하다.0989) 베루개와 날호미 등은 散播(노가리) 혹은 點播(점뿌림)한 논의 제초에 사용되는데, 관개가 전반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논의 경우 급수가 원활하지 못하여 땅이 굳으므로 날이 선 호미가 아니고서는 제초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주로 자갈이 많은 곳에서 낫형의 호미가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0990) 대체로 낫형 호미는 토양 저항이 강한 경우에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5·6세기 이후 관개 수리사업이 활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수리가 확립되지 못하고, 또한 토양의 熟治작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원시형 호미가, 바로 안압지 출토 호미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9세기 무렵의<開仙寺石燈記>에, 황해도·평안도 등지의 乾畓法에 널리 이용되던 京租라는 稻種이 보이고 있는 점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0991)
어쨌든 중경제초용으로 소형 호미가 신라통일기부터 존재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며 장병서 이용을 강조하여 조선 이전의 농법을 조방적이라 단정짓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오히려 鋤地작업이 단병서에 의존하고 있음은 다음의 사료에서 알 수 있다.
⑥ 비 맞으며 논에 엎드려 김매니,
흙투성이 험한 꼴이 어찌 사람 모습이랴만,
왕손 공자는 멸시하지 말라.
부귀 사치가 다 농부로부터 나오나니.
(≪東國李相國集≫권 1, 古律詩, 농부를 대신하여 읊다)
사료 ⑥에서는 비를 맞으며 논바닥에 엎드려 김매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장병서로 서서하는 작업이었다면「伏」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초작업에 단병서가 이용되었다면 고려의 농업경영은 조방경영이 성립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제초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地力 유지를 위해 시비를 해 보았자 잡초만을 생장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해서 시비할 수 없어 농지를 휴한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도0992)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 연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력 회복을 위한 시비기술의 발전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시비기술을 밝혀 줄 만한 사료 역시 극히 희박한 실정이다. 그렇지만 다음 고려 중엽의 사료를 통해 전기부터 糞田法이 상당히 일반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⑦ 直翰林院 李元牧이 祈雨疏를 만들어 올렸는데 時政의 잘못을 많이 말하였다. 왕이 元牧을 불러 말하기를 ‘속담에 봄가뭄은 밭에 거름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어쩌다가 비를 내리는 은택이 있음은 天心의 仁愛로서 대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근래에 태사가 기우를 청하므로 내가 거절하기가 어려워 허락하였는데, 네가 어찌 나의 허물을 끌어넣어 말을 수식하느냐’하고 즉시 다시 짓기를 명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1년 4월).
사료 ⑦에서는 直翰林院 李元牧이 祈雨疏를 올리면서 명종의 실정을 많이 말하니 명종이 이에 대해 속담을 인용하여 꾸짖고 있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속담에까지 糞田이 등장한다는 것에서 이미 분전법이 어느 정도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중국의 경우0993) 제일 먼저 草糞(풀이 무성할 때 베어서 땅 속에 묻어서 비료로 하는 것)은 西周시대에 이미 가장 일반적인 시비 수단의 하나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면 先秦시대에는 대체로 火糞·草糞·人獸糞 등의 초보적인 분전법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대의≪범승지서≫에는 蠶矢와 乾糞이 사용되고 糞種法으로서 종자를 骨汁, 糞汁에 담궜다가 파종하는 漬種法이 나오고 있다. 6세기의≪제민요술≫에는 綠肥法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잠시와 熟糞 등이 소유 면적의 극히 일부분만에 시비할 수 없음에 비해, 시비면적이 대단히 넓고 또한 비료제조의 노력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녹비법은 한정된 지역만을 시비하고, 또한 분종에 치중하던 단계에서 분전이 확대되면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제민요술≫에는 唐代의 기록으로 보이는≪雜說≫에 踏糞法이라는 廐肥法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답분은, 소 한마리가 월동하여 만들 수 있는 양이 겨우 6畝 정도만을 시비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에 보편적이었다 할 수는 없겠다. 그 뒤 원나라 王禎의≪農書≫에는 시비 가운데 답분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는 변화상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중국 강남의 벼농사지대가 중국 농업의 주축이 되고 있는 반영으로서 泥糞(강남 델타지역의 진흙을 비료로 사용)과 石灰(산성토양의 중화제) 등이 새로운 비료로 소개되고 있다.
당시 중국과의 광범위한 서적교류를 생각할 때0994)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농서인≪제민요술≫이나≪범승지서≫의 고려에의 도입과 유통 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나 한다.0995) 그렇다면 최소한 고려 전기에는 초분, 화분, 인수분 등의 초보적인 시비법 뿐 아니라 잠시나 숙분, 지종법, 녹비법, 답분법 등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시비법으로 고려 전기의 농법은 연작법이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고려 전기의 수·한전농법, 농기구, 시비기술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렇게 볼 때 사료 ①의 문종 8년의 전품 규정은, 최소한 平田은 연작법 단계였다고 보이며, 歲易의 빈도에 따른 전품규정은 평전에 준한 山田 규정이었다고 하겠다.
고려는 그 초기부터 권농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나말 혼란기의 민심수습을 위해 문란해진 토지제도와 수취체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민생안정을 위해 農桑을 장려하였다.0996) 또한 광종 연간에는 評農書史0997)라든지 司農卿0998) 등의 관직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중앙 정부에 권농을 담당하는 기구가 만들어졌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지방제도가 대체로 정비되는 성종 연간에는 국가의 권농정책은 지방에 파견한 수령을 통해 수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0999)
권농의 목적은 고려정부가 표방하고 있듯이 민생의 안정에 있다고는 하나 무엇보다도 농민의 경영안정을 도모하여 조세수입을 늘려 재정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농민의 경영 안정을 위한 불필요한 요역금지, 종자지급, 농기구의 賜給, 官牛의 대여 등이 이루어졌고, 또한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선진 농업기술의 전수나 그것을 위한 농서의 연구와 보급 등이 행해졌을 것이다.1000) 이외에도 농경지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 역시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
농경지의 확대에는 크게 新田 개발과 정치사회적 변동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야기된 陳田 개간으로 나눌 수 있다.1001) 그 중에서 陳田 개간에 대한 정부측의 관심은 광종 연간의 다음 기록을 통해 고려 초부터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⑧ 광종 24년 12월 判하기를 ‘진전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사람에게는 사전일 경우 첫 해에는 수확한 것을 전부 지급하고 2년째 비로소 田主와 반을 나누고, 공전은 3년에 한하여서는 전부 지급하고 4년째 비로소 법에 따라 收租한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진전 개간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公·私田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진전 개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며 또한 진전 개간 정도를 국가가 파악함으로써 세수를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전은 황무지가 아니라 한 때 경작하다가 내버려두게 된 토지이다. 사료 ⑧에서 진전의 개간 이후 해마다 생산물 수확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규정이 마련되고 있는 것을 보면, 원래의 경작지에서는 常耕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전 개간과 아울러 아직까지도 광범위하게 남아있던 구릉지 등에의 산전 개발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정부는 경종전시과 단계에서부터 관료들에게 柴地를 田地와 함께 지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지는 단순한 초채지가 아니라 개발 가능한 황무지였다.1002) 경종전시과에서 목종전시과를 거치면서 전지 지급에는 큰 변동이 없으나 시지 지급은 급격히 줄어 들고 있고 과전법 단계에는 아예 시지 지급이 없는 것을 보면, 이 시지가 시대를 내려 오면서 토지로 개발되어 감을 나타내 준다 하겠다. 그러한 산전 개발에는 시지를 지급받는 귀족층 뿐만 아니라 영세농민들도 자신들의 생계 터전을 마련하고자 적극 참여했으리라 생각된다.1003)
고려 전기에 산전 개발이 활발했던 사실은 인종 원년(1123)에 고려를 다녀간 徐兢의 기록에서 단적으로 보인다.
⑨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산간에 밭을 많이 만드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경작하기가 매우 힘이 들고 멀리서 바라보면 사다리나 층계와도 같다(≪高麗圖經≫권 23, 雜俗 2, 種藝).
즉 외국인인 서긍에게는 산간에 治田하고 있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인데, 이것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고려의 지형적 특성에서 연유하지만 당시의 고려에 많은 산전이 개발되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산전 개간에 대한 직접적 자료는 극히 드문 실정이나 고려 전기에 해당되는 몇 사례는 그것을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한다.
하나는 永興鎭의 둔전 개간 사례로1004) 영흥진장 尙舍와 直長 丁作鹽의 권농에 의해 ‘沙石不耕之地’를 개간하여 곡식을 거두고 있는데, 東界 지역에 있었던 영흥진의 위치로 보아 산전 개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 鄭穆이 永淸縣의 수령으로 나가 縣의 서쪽에 있었던 德池原을 화전으로 개간하고 있는 사례가 보이는데,1005) 여기에 심었던 것이 麥(보리)·禾(조)인 것을 보면 이 사례도 산전 개간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몇 안되는 고려 전기의 개간 사례는 주로 산전에 치중되어 있어서 고려 후기의 농경지 개발과는 대단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개간된 산전은 대체로 地品이 평전에 비하여 떨어졌던 것 같다. 이승휴는 삼척에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柴地가 있었는데 이것을 토지로 개간하고 있다.1006) 그런데 토지가 척박하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산전은 보통평전과는 다른 규정이 적용될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한다.1007) 그것은 13세기 초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송광사의 고려 문서에서도1008) 볼 수 있다. 이 문서에는 崔怡(瑀) 이하 여러 명이 祝聖油香寶·忌日寶·忌晨寶 등의 명목으로 송광사에 시납한 토지의 명세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參知政事 최이가 축성유향보로 시납한 寶城郡 任內 南陽縣의 염전과 산전이다. 산전은 염전과 엄연히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산전이 일반 평전의 전답과는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료 ①의 문종 연간의 규정은 고려 초부터 광범위한 개간으로 확보된 산전을 수세대상으로 삼기 위해 마련된 규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려 전기의 농업기술로는 산전은 평전에 비해 척박하였기 때문에 평전처럼 연작하지 못하고 휴한하는 것이 많았지 않았나 한다. 그렇지만 문종 연간에는 전기 이래의 지속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미 산전에도 不易田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魏恩淑>
0943) | 첫째, 고려 전기에는 山田은 歲易農法 단계, 平田은 連作 단계로 보는 설.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東京;改造社, 1937), 145∼148쪽.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魏恩淑,<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李景植,<高麗前期의 平田과 山田>(≪李元淳華甲記念史學論叢≫, 1986). 둘째, 고려전기에는 休閑농법이 일반적이며 고려 후기 내지 선초에 가서 常耕化가 보편화된다고 보는 설. 李泰鎭,<畦田考>(≪韓國學報≫10, 1978;≪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14·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9, 1979;위의 책). 宮嶋博史,<朝鮮農業史上における十五世紀>(≪朝鮮史叢≫3, 1980). ――――,<朝鮮史硏究と所有論>(≪東京都立大學 人文學報≫167, 1984). 李鎬澈,≪朝鮮前期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姜晋哲,<高麗時代의 地代에 대하여>(≪震檀學報≫53·54, 1982). 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1987). 셋째, 고려 전시기에 걸쳐 연작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전기에는 토지생산성이 낮고 심히 불안정하여 진전화되기 쉬운 단계로 보는 설. 浜中昇,<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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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4) | 白南雲, 위의 책. 朴克采,<朝鮮封建社會의 停滯性本質>(≪李朝社會經濟史≫, 1946). 朴時亨,<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需檀學報≫14, 1941). 金載珍,<田結制硏究>(≪慶北大論文集≫2, 1957). 朴興秀,<新羅 및 高麗의 量田法에 관하여>(≪學術院論文集≫11, 1972). 金容燮, 위의 글. 姜晋哲,<田結制의 문제>(≪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宮嶋博史, 위의 글(1980). 金泰永,<科田法體制下의 土地生産力과 量田>(≪韓國史硏究≫35, 1981). 浜中昇,<高麗前期の量田制について>(≪朝鮮學報≫109, 1983). ―――,<高麗後期の量田と土地臺帳>(≪朝鮮學報≫112, 1984).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1985). 李鎬澈,<토지파악방식과 田結>(위의 책). 呂恩暎,<高麗時代의 量田制>(≪嶠南史學≫2, 1986). ―――,<高麗時代의 量制>(≪慶尙史學≫3, 1987). |
0945) | 고려후기의 수리시설·시비법·품종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이 있고, 水·旱田에서의 구체적인 파종 방식을 다룬 것으로 李平來,<高麗前期의 耕地利用에 관한 再檢討>(≪史學志≫22, 檀國大, 1989)가 있다. |
0946) | 대체로 휴한농법 단계로 파악할 경우 토지 소유권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농민에 대한 공동체의 규제가 강하였다고 보는 반면, 상경화 단계에 있었다고 할 경우에는 사적 토지소유권이 발달하고 농민은 공동체에서 분리되었다고 보고 있다. |
0947) | 첫째, 고려 전기에는 山田은 歲易農法 단계, 平田은 連作 단계로 보는 설.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東京;改造社, 1937), 145∼148쪽.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魏恩淑,<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李景植,<高麗前期의 平田과 山田>(≪李元淳華甲記念史學論叢≫, 1986). 둘째, 고려전기에는 休閑농법이 일반적이며 고려 후기 내지 선초에 가서 常耕化가 보편화된다고 보는 설. 李泰鎭,<畦田考>(≪韓國學報≫10, 1978;≪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14·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9, 1979;위의 책). 宮嶋博史,<朝鮮農業史上における十五世紀>(≪朝鮮史叢≫3, 1980). ――――,<朝鮮史硏究と所有論>(≪東京都立大學 人文學報≫167, 1984). 李鎬澈,≪朝鮮前期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姜晋哲,<高麗時代의 地代에 대하여>(≪震檀學報≫53·54, 1982). 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1987). 셋째, 고려 전시기에 걸쳐 연작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전기에는 토지생산성이 낮고 심히 불안정하여 진전화되기 쉬운 단계로 보는 설. 浜中昇,<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
0948) | 李泰鎭, 앞의 글(1978;앞의 책, 64∼67쪽). |
0949) | 西嶋定生,<火耕水耨について>(≪中國經濟史硏究≫, 1966). |
0950) | 米田賢次郞,<應召 ‘火耕水耨’ 注り見たる後漢江淮の水稻作技術について>(≪史林≫38-5, 1955). ―――――,<漢六朝間の稻作技術について>(≪鷹陵史學≫7, 1981). |
0951) | 西嶋定生, 앞의 글, 195∼200쪽. |
0952) | 米田賢次郞, 앞의 글(1981), 15∼22쪽. |
0953) | 여기에 대해서는 魏恩淑, 앞의 글(1988), 113∼121쪽 참조. |
0954) | 池泳鱗,<咸鏡北道吉州地方の輪畓に關する調査-附 畑作灌水に關する調査->(≪朝鮮農會報≫9, 1935). |
0955) | ≪世宗實錄地理志≫에 의거할 경우 세종대에는 水田이 전체 경지면적의 약 21% 旱田이 약 72% 정도이다(宮嶋博史, 앞의 글, 1980, 46쪽 참조). |
0956) | 西嶋定生,<碾磑の彼方>(앞의 책). 西山武一,<齊民要術の農學>(≪アジア的農法と農業社會≫, 1969). 天野元之助,<魏晋南北朝における農業生産力の展開≫(≪史學雜誌≫66-10, 1957). |
0957) | 西嶋定生, 위의 글. |
0958) | 天野元之助, 앞의 글. |
0959) | 米田賢次郞,<齊民要術と二年三毛作>(≪東洋史硏究≫17-4, 1959). |
0960) | 閔成基,<漢代麥作考>(≪東洋史學硏究≫5, 1971). |
0961) | 다른 논자와는 달리 西山武一은 2년 3작의 윤작체제 성립을 최근의 백년 정도의 일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近世華北旱地農法考>, 앞의 책). |
0962) | 특히 宮嶋博史의 경우는≪農事直說≫단계에 이미 旱田에서는 2년 3모작이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앞의 글, 1930, 47∼61쪽). |
0963) | ≪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9월 경신. |
0964)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성종 11년 判. |
0965) | 고려시대의 旱田에서 2년 3모작이 시행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李春寧,≪李朝農業技術史≫(1964), 36쪽. 李平來, 앞의 글. 李春寧의 경우 별다른 논증 없이 견해를 제시했고, 李平來는 華北 旱地農法과의 비교를 통해 늦어도 8∼9세기에는 2년 3모작이 확립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
0966) | ≪三國遺事≫권 1, 第三弩禮王.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3년조. |
0967) | “王耒耜一具 王太子三公諸尙書卿各一具 共十具…又設庶人耕位 於從耕官位之南 小東十步外 庶人四十人並靑衣 耕牛八十 每兩牛隨牛人一人 耒耜四十具 畚二十具 鍤十具 以木爲刃”(≪高麗史≫권 62, 志 16, 禮 4, 籍田). 耒耜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쟁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牛 80:耒耜 40이라는 비율을 보면 당시의 쟁기가 兩牛犁였음을 추측케 한다. |
0968) | 閔成基,<李朝犁에 대한 一考察>上·下(≪歷史學報≫87·88, 1980). |
0969) | 閔成基,<農家月令과 16세기의 農法>(≪釜大史學≫9, 1985). |
0970) | 李鎬澈, 앞의 책, 306∼330쪽. |
0971) | 金光彦,≪韓國農器具考≫(1986). |
0972) | 西山武一, 앞의 글(1969), 74∼80쪽. |
0973) | 飯沼二郎·堀尾尙志,≪農具≫(1976) 참조. |
0974) | “牛工農具 大同小異 略而不載”(≪高麗圖經≫권 23, 雜俗 2, 種藝). |
0975) | ≪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奎報. |
0976) | 飯沼二郎,≪世界農業文化史≫(1983), 12∼16쪽. |
0977) | 한국의 호미는 중국·일본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독자의 除草 용구이다(宮嶋博史, 앞의 글, 1980, 65쪽 및 林和男,<朝鮮農業技術の展開>,≪朝鮮史叢≫4, 1980, 7쪽). |
0978) | 閔成基,<東아시아 古農法上의 耬犁考>(≪朝鮮農業史硏究≫, 1988), 22쪽. |
0979) | 宮嶋博史, 앞의 글(1980), 68쪽. |
0980) | 李鎬澈, 앞의 책, 171∼184쪽. |
0981) | 김광언,<신라시대의 농기구>(≪민족과 문화≫Ⅰ, 1988), 71∼72쪽. 1921년부터 1986년 전반기 사이에 간행된 발굴보고서 및 이와 유사한 57종의 문헌을 통계 낸 결과 현재로서는 유일한 출토의 예라고 한다. |
0982) |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雁鴨地-발굴조사보고서-≫(1978). |
0983) | 文化財管理局,≪慶州 皇南洞 第98號古墳(南墳) 發堀略報告≫(1976). |
0984) | 李賢惠,<韓國古代社會의 國家와 農民>(≪韓國史 市民講座≫6, 1990), 26쪽. |
0985) | 李基白,<永川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285쪽. |
0986) | ≪三國遺事≫권 1, 第三弩禮王.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3년조. |
0987) | 張籌根,<韓國의 農耕과 歲時風俗>(≪韓國의 農耕文化≫, 1983), 39∼40쪽. |
0988) | 김광언,≪한국의 농기구≫(1969), 109∼115쪽. |
0989) | 정시경,<호미의 유형과 그 분포>(≪북한의 민속학≫, 1989), 207∼209쪽. |
0990) | 제주의 호미(갱이)는 숨베와 날이 거의 직각을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그 날의 너비(보통 2㎝)가 거의 일정한데 이것은 자갈 함량이 높은 경작토들의 악조건 하에서 김을 뽑아낼 때 보다 쉽도록 하기 위하여 날이 좁고 또 협소하게 만들어졌다 한다(高光敏,<제주도 쟁기의 형태와 밭갈이 방법>,≪韓國의 農耕文化≫2, 1988, 106쪽). |
0991) | 魏恩淑, 앞의 글(1988), 99∼101쪽. |
0992) | 李泰鎭, 앞의 글(1978;앞의 책, 72∼73쪽). |
0993) | 米田賢次郎,<中國古代の肥料について>(≪滋賀大學學藝學部紀要≫13, 1963) 참조. |
0994) | 金庠基,<宋代에 있어서 高麗本의 流通에 대하여>(≪東方史論叢≫, 1986) 참조. |
0995) | ≪氾勝之書≫는 宣宗 8年(1091)에 宋으로부터 高麗에 求書가 요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고려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8년 6월). |
0996) | “高麗太祖卽位 首正田制 取民有度 惓惓於農桑 可謂知所本矣”(≪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太祖卽位之初 首詔境內 放三年 田租 勸課農桑 與民休息”(≪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
0997)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1년 3월. 評農書史의 기능에 대해서는 金琪燮, 앞의 글, 137∼139쪽 참조. |
0998)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23년 8월. |
0999)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성종 5년 5월. |
1000) | 金琪燮, 앞의 글, 136∼140쪽. |
1001) | 고려시대의 新田 개발과 진전 개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洪淳權,<高麗時代의 柴地에 관한 고찰>(≪震檀學報≫64, 1987). 李平來,<高麗前期의 農耕地開墾과 그 意味>(≪龍巖車文燮博士華甲紀念論叢≫, 1989). 박경안,<高麗後期의 陳田開墾과 賜田>(≪學林≫7, 1985). 李宗峯,<高麗後期의 勸農政策과 土地開墾->(≪釜大史學≫15·16, 1992). |
1002) | 여기에 대해서는 洪淳權, 앞의 글 및 李平來, 앞의 글(1989) 참조. |
1003) | 李景植, 앞의 글, 43쪽. |
1004)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문종 13년 2월. |
1005) | <鄭穆墓誌銘>(≪東萊鄭氏 文景公派世譜≫). |
1006) | 李承休,≪動安居士集≫, 雜著, 葆光亭記. |
1007) | 조선시대에도 산전에 대한 田品 규정은 평전과는 달리 1甲·2甲·3甲·4甲 등 甲品制에 의해 田品이 매겨졌다(≪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7월 무진). |
1008) | ≪曹溪山松廣寺史庫≫, 國師當時大衆及維持費. 이 문서의 작성시기에 대해 任昌淳은 1221년부터 4∼5년 이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松廣寺의 高麗文書>,≪白山學報≫11, 1971), 朴宗基는 1221∼1223년 사이로 보고 있다(<13세기 초엽의 촌락과 部曲>,≪韓國史硏究≫33, 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