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금의 건국과「정강의 변」
전연의 맹약 이후 화평관계가 계속되었으나 송의 휘종과 거란(요)의 天祚帝때에 이르러 두 나라는 모두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주의 사치가 심해져 결국 정치는 실권을 쥐고 있는 관료의 손에 좌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 만주의 동북쪽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흥기하여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여진족이 일어나는 데 중심세력이 된 것은 송화강의 지류인 아르치카강 기슭에 살고 있던 完顔部였다. 이 지역은 거란의 동북국경과 가까우며 철이 많이 나고 거란족이 좋아하는 海東靑의 산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산물은 그들의 생계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1세기 초 당시 요 천조제는 송으로부터 받은 세폐에 빠져 향락을 일삼았으며, 관리들의 부패 또한 만연하여 각지에는 발해인·여진인들의 반란이 자 주 일어났다. 특히 해동청 등 공물징수를 담당하는 거란인 관리의 착취와 여 진인에 대한 멸시는 여진족들로 하여금 거란에 반감을 갖고 그들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이러한 반거란 감정을 토대로 전여진인을 뭉치게 한 이는 바로 완안부의 阿骨打였다.
아골타는 天慶 4년(1114;고려 예종 9) 가을 요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북류 송화강 동쪽 寧江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북쪽 송화강을 건너 賓·祥·咸州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이곳에 살고 있던 熟女眞과 발해인 을 항복시켰다. 영강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아골타는 천경 5년 정월, 여진족을 통합한 하나의 왕국으로 국호를「大金」이라 하고 칭제하였다. 이듬해 봄 태조 아골타는 요의 동북면 방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黃龍府(농안)를 함락하고 다시 천조제의 親征軍을 護步荅岡(길림성 부여) 부근에서 격파시키며 대세를 장악하였다. 다시 거란 동경에서 발해인 고영창의 반란이 일어나 어수선해지자 이 틈을 이용해 東京(요양)을 공략하고, 요동반도의 曷蘇館女眞 및 그 동쪽의 高州·保州 방면의 숙여진을 복속시켜 여진통합의 숙원을 완성하고 연호를 天輔로 고쳐 이를 기념하였다(1117).
이 당시 태조 아골타의 계획은 전여진 통합과 이에 대한 거란의 인정을 받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의 화평교섭을 추진, 사신왕래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금 건국 후 국내 부족세력을 정리하는 내치에 전념하였다. 그것은 바로 猛安謀克制의 개혁이었다. 태조는 영강주전투에서 승리한 후 안으로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인 勃菫〔보긴〕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그 세력의 고하에 따라 猛安(천부장)과 謀克(백부장)으로 개편하여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완비하였다. 그리고 영토의 확장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직업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다시 부족제인 보긴을 군대지휘관 또는 지방장관으로 삼았는데 지방장관인 세습맹안과 세습모극의 자격을 종전처럼 옛 토착세력인 보긴에 한하여만 수여한 것이 아니라 완안부에 충성도가 높은 일반 군인에게도 허용하였다.
이렇게 내치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터에 지금까지 금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송에서 사신을 보내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송 휘종은 그들의 전통적인 以夷制夷政策에 의거해 금의 군사력을 이용해 거란을 멸망시킬 계획에 따라 선하 2년(1120;고려 예종 15) 사신 馬植을 통해 협공을 제의하며 그 조건으로, ① 종래 송이 요에 보낸 세폐를 금에 보낸다는 것과 ② 금은 만리장성 이북의 땅을 공격해 취하고, 송은 장성 이남의 땅을 공격해 취하기로 하되 서로 장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 다시 ③ 요의 南京(北京)은 송이 함락시키고 西京(大同)은 금이 공격하되 함락 후에는 송에게 되돌려준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 즉 서경을 송에 되돌려준다는 조항에 대한 타협을 보지 않은 채 두 나라는 요협공작전에 들어갔다.
금군은 평지의 松林으로부터 古北口쪽으로, 송군은 白溝河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금은 요의 上京·中京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천조제를 쫓아내 서경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남경에 쳐들어간 송군의 상황은 달랐다. 宋將 童貫이 이끄는 송군과 대치하고 있던 요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 오히려 송군은 蘆溝싸움에서 완패당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군수품 또한 바닥이 났다. 이에 동관은 패전 책임의 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밀리에 금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아골타는 곧바로 진격해 요군을 궤멸시켰다. 이 싸움의 승리로 금 태조는 장성을 넘어 남경까지 들어가고 송에 대한 자신감까지 얻게 되었다.
거란을 내쫓은 데 성공한 송·금의 연합군은 사전 약속에 따라 전후문제를 처리하였다. 송은 약속에 따라 남경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금이 직접 싸워 뺏은 땅이라 하여 반환을 거부하였다. 이에 송은 남경을 반환받는 조건으로 다시 新約을 맺어 원래 약속한 은 20만 냥·비단 30만 필의 歲幣 이외에 代稅錢으로 은전 100만 냥과 군량 20만 석을 추가하여 주기로 하였다.451) 이에 금군은 남경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금군은 성안의 인민과 재물을 모두 털어 빈 성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송은 오랫동안 거란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는 데 의미를 갖고 이를 환영하였다. 그 후 금의 아골타가 죽고 그 후임으로 요에 볼모로 잡혀간 적이 있던 동생 吳乞買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太宗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陰山으로 도망가 숨어 있던 천조제를 생포하니 이로써 거란은 건국 후 2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1125).
한편 신약에 따라 요의 남경 이하 6주를 돌려 받은 송은 세폐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밀리에 금 조정의 내분을 사주하였다. 이 사실을 안 금 태종은 송의 배신을 응징하는 군사를 일으켜 송의 수도 개봉 가까이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놀란 송의 휘종은 배신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황위를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금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欽宗 靖康 원년(1126) 정월 수도를 포위하였다. 이에 놀란 송 조정은 금 5백만 냥·은 5천만 냥·우마 1만 필·표단 1백만 필을 증여하고 화북의 요충지인 中山·河間·太原의 3鎭 33州를 금에 이양하며, 금제와 송제는「숙질관계」로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1126).
이에 금에서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燕京(북경)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하지만 그 후 송은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금 태종은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같은 해 윤 11월, 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당황한 송은 황하 이북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구하였으나 몇 차례에 걸쳐 송의 배반을 경험한 금 태종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쳐들어갔다. 송군을 격파한 금은 그들이 점령한 황하 이남의 송나라 땅을 다스리기 위해 괴뢰정부로 楚國을 세우고 다음달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3,000명의 황족을 인질로 삼아 본거지인 만주로 철수하였다.452) 이로써 송은 건국 168년 만에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것이 바로「정강의 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