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금과 남송의 화전
정강의 변 직후, 금에 끌려가는 것을 모면한 휘종의 아들 康王을 중심으로 송의 각지에서는 義勇勤王軍이 모여 송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이에 강왕은 南京 應天府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高宗이다. 그 후 다시 금군의 추격을 받자 양자강 남쪽 杭州로 옮겨 그곳을 臨安府로 고쳐 수도로 정하고 기강을 바로하니 이것이 바로 南宋의 시작이다.
한편 금 태종은 금에 볼모로 잡혀와 있는 張邦昌을 내세워 초국을 대신 다스리게 하고 거란이 다스리던 華北지방은 한족을 통치한 경험이 있는 한인과 거란인 관리로 하여금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금 태종이 만주로 들어가자 황제 장방창은 퇴위되어 초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초국의 폐지와 남송 건국 소식을 들은 태종은 다시 군사를 몰아 고종을 쫓아 수도 임안을 함락시키고 깊숙히 明州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뒤이어 후원병이 이르지 않아 곤경에 처하게 되니 금군은 군대를 철수하였으며 남송의 고종도 다시 수도 임안으로 돌아오니 양측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초국의 송 세력을 일소한 금 태종은 다시 齊國을 세워 한족 관리인 劉豫를 황제로 임명하였다. 유예는 변경에서 송의 옛 관료들을 등용하여 관제 를 세우고, 과거제를 실시하며 징병제와 주화 交鈔를 발행하는 등 독립국가로 서의 체제를 갖추었지만 여러 차례 금군에 협력하여 남송의 침입을 꾀하는 등 괴뢰국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 유예의 제국을 둘러싸고 금 황실내부에서 권력싸움이 일어나 결국 제국폐지론이 우세해져 제나라는 건국된 지 8년만인 천회 15년(1137)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제국의 존속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금과 남송의 완충국으로서의 위치는 금으로 하여금 帝國으로서의 내정을 다지며 또 점령지에 대한 통치방법에 대해 귀중한 체험을 하도록 하였다.453)
한편 남송은 고종을 중심으로 뭉쳐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岳飛·韓世忠과 같은 실전에 강한 장군들을 등용하여 금에 대한 반격을 개시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 무렵 금에서는 태종이 죽고 熙宗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태종과 달리 영토확장보다는 내치에 주력하고자 했으므로 양극 사이에는 화평의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송에서는 금의 인질로 잡혀가 있던 秦檜가 귀국하여 금 조정에서 사귀어 둔 인맥을 통해 금과의 화평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갔다. 특히「정강의 변」으로 만주땅에 잡혀가 있던 휘종 및 흠종 두 황제와 생모 偉氏가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라는 고종의 염원에 의해 진회는 요직에 등용되어 금과의 화평교섭을 전담하게 되었다. 진회의 이러한 화친정책에 대하여 한세충·악비 등 주전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진회는 이들을 과감히 제거하고 금과의 강화를 매듭지었다. 그 조약의 내용은 ① 두 나라의 국경선은 淮水에서 서북의 陝西大散關까지로 할 것 ② 매년 송에서는 은 25만 냥·견 25만 필을 금에 세폐로 바칠 것 ③ 송 고종은 금 의종에 대하여「신하의 예」를 갖추며, 금의 책봉을 받아 황제가 된다는 것(희종 황통 원년;1141)으로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화의에 따라 이미 적지에서 죽은 휘 종의 관과 모친 위씨가 송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나라는 거의 20년간 전쟁의 소모없이 각기 내치에 힘쓸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특히 이 화평기간은 남송으로 하여금 어느 때보다 내실을 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양자강 유역의 개발에 따른 수리시설의 확충은 쌀·사탕수수·차 등의 농업생산력을 증가시켰으며, 남아 도는 노동력으로 각지에서는 분업적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 예가 바로 越州·安 州·汝州 등의 도자기산업을 비롯하여 東絹·蜀錦·北絹·越羅 등의 견직물 산업의 발전이다. 또 제지업도 발전하여 관용의 소비뿐 아니라 인쇄·출판업 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들 상품 교환경제의 활성화는 동전뿐 아니라 운반 이 쉽고 위험성이 적은 지폐사용을 자극하였다. 양자강 등 큰 강과 호수를 끼고 있는 입지조건은 해상교통의 발전을 가져와 먼 지역까지 대량화물을 운반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는 그 규모에 있어 북송 때의 수준 을 훨씬 능가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송의 비단·서적 등이 고려·일본 및 동남아 여러 지역까지 전파되어 각국의 무역의 폭을 넓혔다.454)
하지만 이러한 남송의 번영은 금으로부터의 침입이 없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송과의 화평조약을 맺은 희종이 종제인 海陵王에 의해 시해되자 이러한 상황은 다소 변화하게 되었다. 즉 天德 원년(1149) 중국문화의 애 호자였던 해릉왕은 소박한 여진사회의 습속에서 벗어나 선진의 한문화를 통해 중원의 왕조다운 국가로 키우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거란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중원을 점령한 북방정권의 공통된 과제가 전쟁을 통해 빼앗은 한문화를 포용하되 어느 선까지 국가운영에 채용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금 역시 여진의 고유풍습을 우위에 둘 것인가 아니면 나라 발전을 위해 과감히 구습을 버리고 나라 전체를 漢化할 것인가를 놓고 왕을 비롯한 종실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희종이 전자였다면 이러한 희종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는 종실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해릉왕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자 해릉왕은 스스로 중국의 통일자로 자처하고 대대적인 사민정책과 함께 동북쪽에 치우쳐 있던 수도를 만주의 上京會寧府에서 중경인 燕京으로 옮겨 중원국가로서의 외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추밀원 등 직속 관제를 두어 종실의 정치개입을 차단하여 황제권을 강화시키는 한편,455) 밖으로 송에 대한 남침을 개시하였다(正隆 6년;1161).
하지만 이 남침은 큰 실수였다. 과중한 전쟁비용과 징병은 국민들의 불만 을 고조시켜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렇게 민의 지지가 없는 데도 해릉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회수 이남 양자강을 넘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해릉왕 자신의 정치생명을 단축할 뿐이었다. 이 때 요양에 있던 東京留守 烏 祿은 많은 호족들의 지지와 불만 군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해릉왕을 폐하고 새로운 황제에 옹립되었다. 이가 바로「小堯舜」으로 불리는 금나라 최고의 명군주 世宗이다. 즉위후 세종은 해릉왕에 의해 초래된 국내외의 위기를 처리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어 반격해 오는 송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대를 진격시키는 한편, 외교적으로 송과의 교섭도 진행시켰다.
당시 남송에서도 고종이 죽고 孝宗이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재상 張浚의 주전론에 따라 금과의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금의 방어군에 대패하여 군인들의 사기가 실추되었다. 이에 양국은 다시 조약을 맺으니, 그 내용은 ① 송에서는 매년 금에 바치던 세폐의 양을 각각 5만씩을 줄여 은 20만 냥·견 20만 필로 할 것 ② 이전 금에 대한「신하의 예」를 고쳐「숙질관계」로 할 것 ③ 외교문서의 격식은「表」에서「國書」로 한다는 것이었다(大定 5년;1165). 이로써 금은 해릉왕의 무모한 전쟁으로 지금까지 누려왔던 경제적 이익과 국제적 권위가 손상되었다.
그러나 이후 두 나라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각각 내치에 힘을 기울여 국가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대외정책에 있어 금 세종은 고려 무신정권에 대해 우호정책을 견지하였다. 그 결과 고려 역시 적극적인 대금친선정책을 펴게 되니, 고려와 송과의 정치적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지게 되었다.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