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원평전쟁과 겸창막부 수립
이렇게 일본조정에까지 그 위엄을 떨쳤던 거란이었지만 전술하였듯이 1125 년 금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뿐만 아니라 송조차 금의 공격으로 양자강 이 남으로 밀려나 남송시대를 열어야 했다. 이러한 대륙의 급격한 정세변동과 마 찬가지로 일본열도 또한 일본사에 있어서 격동기였다.462) 攝關政治의 몰락에 대신하여 퇴위한 천황(上皇)에 의한 통치형태인「院政」이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생기고 이어 平氏에 의한 정권독점 및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통치형태로서 幕府政權이 수립되었다.
10∼11세기에 일어났던 몇 차례의 쿠데타는 몇몇 군사적 유력자가 대두하 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東國에서 일어난 平將門(타이라노 마사카도)事件을 들 수 있는데 그는 桓武천황의 5대 후손으로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935년 평 장문은 친족인 常陸의 國司(코구시) 대리였던 平國香을 공격하여 살해했으며, 4년 뒤에는 京都 8개 國의 지배권을 요구하면서 下野와 上野의 國府(코쿠후) 를 점령하고 스스로「새로운 천황」을 칭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그의 반란은 결국 하야의 신임 押領使인 藤原秀鄕과 평국향의 아들 平貞盛에 의해 진압되고 평정성은 이 난을 진압한 공로로 鎭守府將軍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 당시 서일본 해안에는 해적이 횡행하여 조세수송까지 방해하였다. 게 다가 이들 해적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조차 해적이 되어 이 지방을 공포로 떨게 하였는데, 이러한 해적세력은 939년 새로운 지방귀족의 군사력에 의해 겨우 진압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방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源經基(미나모토노 츠네모토)였다.
이러한 정변 처리의 결과로 平氏와 源氏 일족은 점차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여러 곳의 지방장관을 역임하면서 많은 장원을 그들의 수중에 넣고 이러한 재력은 더 많은 전투력의 증강을 가능케 하였다. 11세기 말엽 원 씨는 關東에서, 상황들의 후원을 받고 있던 평씨는 畿內에서 세력을 굳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새로운 지방귀족은 각 국의 치안을 담당하는데 그 치지 않고 중앙의 권력투쟁에까지 참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156 년의「保元의 亂」이다.
12세기 중엽 수도 경도는 정치의 중핵이었던 院廳(인노쵸오)의 등원가와 대사원 등이 상쟁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1156년 崇德상황과 後白河천황 사이의 갈등은「보원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결과는 후백하천황을 지지했던 平淸盛(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승리로 돌아갔다. 평청성은 다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원씨의 지도자 源義朝(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음모사건도 평정함으로써 조정안에서 더 이상 대적할 자가 없게 되었다. 이후 그는 지방귀족으로는 처음으로 參議로 승진되고 公家들과 함께 중앙 상층부의 정책에 참여하는 인물이 되었다.
평씨는 과거 등원씨가 했던 것처럼 중앙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황족과 혼인관계를 맺어 그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자신은 태정대신이 되고, 그 아들은 內大臣이 되었으며, 40명 이상의 친척이 조신의 반열에 포진하였다. 1184년에는 어린 손자를 安德天皇에 즉위시키니 이로써 사실상 조정의 최고 지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하여 六波羅(로쿠하라)에 있던 그의 사령부는 등원씨의 政所(만도코로)나 상황의 院廳을 능가하며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1160년부터 1185년의 시기를「로쿠하라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평씨의 집권은 그의 불손한 행위로 곧 조정과 승려의 심한 반발을 받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한때 그의 후원자였던 후백하천황(1169년부터 법황)조차 그의 제거계획에 참여하였다. 1180년 원씨의 잔당과 園城寺·興福寺의 승려 및 후백하법황의 황자인 以仁(모치히토) 등에 의해 평씨제거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이 거사는 곧 진압되었으나 그 실패를 안타까워 한 많은 무사들이 源賴朝(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뭉쳐 평천성에 대항하였다.
5년간 계속된 원씨와 평씨의「源平(겜페이)戰爭」에서 최후 승리한 원씨는 전국에 걸친 군사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씨는 평씨와는 다른 방법으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천황정부의 인가 아래 수도 경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鎌倉(카마쿠라)에 별개의 막부를 설치하여 중앙의 구귀족들의 조정을 피해가면서 중앙의 권력을 탈취해갔다. 이러한 통치방법으로 그는 외곽에 머물면서 군사력과 인적 조직을 증강시켜 갔으며 이어서 궁정위계와 칭호까지 받아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1185년에는 헌병사령관인 總追捕使의 칭호를 받아 자신의 세력기반인 동국은 물론 서국의 무사에 대한 임명권과 궁정과 사원이 갖고 있는 장원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190년에는 總守護·總地頭라는 칭호를 획득하여 武家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征夷大將軍의 칭호를 받아 최상의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원씨는 천황 政體의 파괴자가 아니라 보호자로서, 봉건적 지휘계통에 기초한 합법적인 행정제도를 실현한 것이다. 그 결과 경도에 중심을 둔 문관정치의 여러 기관이 폐지·흡수되니 겸창은 이제 단순한 무사의 사령부가 아니라 전국적인 행정기관을 통솔하는 도시로 탈바꿈하며 일본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463)
한편 그동안 고려는 일본의 항해술 미발달과 일본 조정의 폐쇄정책 등으로 일송무역의 중계역할을 하며 무역차액을 획득해왔다. 하지만 12세기 무신란 등의 고려정국의 변화와 후백하 원정시대 이래 일본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힘입어 일송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고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즉 承安 2년(1172) 9월 송 효종은 후백하법황과 평청성에게 國書와 贈物을 보내 朝貢使의 파견을 요구해 왔다. 당시 송에서 보낸 국서에「日本國王」이 라고 칭하였다고 하여 이의 접수를 반대한 자들도 있었으나 실권자인 평청성은 이러한 반대를 무시하고 송의 사절을 인견하고 효종에게 返書와 返禮品을 보내 송과의 외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로써 일·송 양국의 상선이 博多와 明州를 중심으로 왕래하니 일본도 동아시아 교역권안에 들게 되었다. 당사 일본에서 송에 보낸 수출품으로는 사금·수은·유황·진주·나전·도검·일본선(부채)·蒔繪 등이 있었으며, 송으로부터의 수입품은 唐絹·唐綾·唐錦 등의 고급 직물을 비롯하여 향료·약품·도자기·서적 등이었다. 특히 12세기 무렵에는 일본 국내의 상업도 발달하여 유통경제가 활성화되니 국내 통화로서 政和通寶와 같은 여러 宋錢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주요한 수입품이 되었다.464)
<朴漢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