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본의 정치동향
가. 평안시대의 섭관정치
중국 대륙에서 송이 중원을 통일하고, 북방의 요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平安(헤이안)시대로서 藤原家에 의한 귀족정치가 극성을 이루고 있었다(858∼1160).
794년 수도를 平城(奈良)에서 평안(京都)으로 옮겼던 초기만 하여도 일본 은 桓武天皇과 이후 3대 천황들의 혁신정치에 의하여 중앙집권적 관료기구가 효과적으로 운영되어 천황의 전제권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당나라와의 교역이 추진되고, 아울러 당나라 유학승인 傳敎大師 最澄(사이쵸오)에 의해 창시된 天台宗과 홍법데사 空海(쿠우카이)에 의해 창시된 眞言宗은 천황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국가사상으로서 발전해 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기구의 정점으로서 천황의 권위를 지탱해 온≪大寶律令≫의 원칙이 희박해지면서 조정의 대귀족과 불교사원들에 대한 천황의 강력한 통치력은 상실되어 갔다. 나아가 귀족들은 도시나 國(쿠니)에 거점을 가지면서 자신의 지위를 굳혀 가니 점차 권력의 지방분권화와 세습제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중앙재정의 축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나라의 모든 토지는 황제의 토지”라는 율령제도에 입각해 재편되고 운영 되어 온 口分田을 토대로 한 중앙정부의 수입은 점차 줄어들게 되고, 대신 각 지방귀족이나 사원의 사유지로 조세가 면제된 莊園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원이라는 것은 원래부터≪대보율령≫의 결함에서 야기된 것만도 아니며 귀족에 의한 수탈 때문에 나타난 형태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유권이 여러 차원에서 확장된 결과라 하겠다. 즉 귀족들에게 공직에 대한 급부 로서 지급되었던 공해전·위전·직전 따위가 영업전으로서 상속되어 갔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진전의 개발을 통한 사적 소유권의 확대였 다.
중앙정부는 재원이 되는 구분전의 확대를 위해 개간을 장려하고 때로는 개간지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주어 새로 개간한 토지에 대하여는 1대 내지 3대 에 걸쳐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러다가 743년 聖武천황은 신전에 대한 개간자의 영구소유를 허락함으로써 토지공유의 근본개념을 와해시켰다. 그 후 이러한 사유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면세특권이 부여되었다. 여기서의 면세란 세액의 면제뿐 아니라 지방관청의 지조검사나 경찰관리 등과 같은 기관의 보호와 간섭으로부터 불가침권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천황의 권한이 지방에까지 침투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적 보유지, 즉 장원제도는 8세기 경까지는 드문 현상이었으나 13 세기 경에 이르면 2∼3백 명에 불과한 귀족들에 의해 전국토가 5천 개의 장 원구역으로 분할되는 양상을 보였다. 더구나 장원의 소유자가 행사할 수 있는 각종 면세특권이 권력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확보됨에 따라 소유자(즉 영 주)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땅을 새로 구입하거나 권력을 이용해 공유지를 불법 적으로 병합하여 그 규모를 확대해 갔다. 이외에도 寄託에 의한 장원 확대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장원제의 발달, 지방분권화 경향과 세습제의 영향으로 9세기 중엽 에 이르러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른 귀족이 있었으니 바로 藤原家이다. 이 가문은 7세기 天智천황을 보필하여 大和改新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한 中臣鎌足(나카토미노 카마타리)457)의 후손이다. 그는 이외에도 천황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사건과 나라에서 경도로 수도를 옮기는 일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천황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이러한 천황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그의 후손인 藤原良房(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은 太政大臣에 임명되어 전 관료에 대한 통치권을 허락받았고 이를 계기로 등원가가 황실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천황의 신뢰와 요직을 확보한 등원양방은 마침내 황족을 제거하고, 仁明천황의 후임으로 자신의 생질인 道康親王을 황태자로 삼았으며, 866년에는 자신의 나이 어린 외손자 淸和를 제56대 천황에 즉위시키고 자신은「攝 政」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이처럼 어린아이를 천황에 즉위시킨 것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일본 역사상 황족이 아닌 인물이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전담하기는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이 성인이 되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 섭정의 자리였지만 등원양방은 다시「關白」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擅斷을 계속하였다. 등원양방 사후 그의 양자 藤原基經(후지와라노 모토쓰네)이 제57대 陽成천황의 섭정이 되었는데 그는 양부보다 더욱 강력한 권한을 장악하였다. 양성천황이 16세가 되자 압력을 넣어 천황의 자리를 光孝천황에게 양위케 하였으며, 등원기경의 후원으로 천황의 자리에 오른 광효천황은 그의 권위를 강화시켜 주는 데 주력해야 했다. 이리하여 등원기경은 제59대 宇多천황대까지 섭정과 관백이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모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니 이 때부터「섭관정치기」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9세기 말부터 등원가는 천황을 대신하여 중앙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장악하는「攝」·「關」이라는 두 지위의 독점과 황족의 외척이 되는 특권을 보유하며 200년 가까이 일본정치사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458)
등원가의 전성기는 藤原道長(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섭관기였다. 그는 30년 동안 사실상의 최고통치권자로, 4명의 천황이 그의 사위였으며 다른 3명의 천황은 그의 외손자였다. 등원도장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천황 주위 의 다른 세력을 제거하며 등원가의 권력독점을 유지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위 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의식적인 도피증을 낳게 하였다. 마침 당시 지진과 화재, 천연두의 만연과 같은 재해가 빈번하였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등원가에 의해 억울하게 피살된 원혼들이 내린 재앙이라 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원혼을 달래는 제사가 행해졌으며, 흉흉한 민심에 대하여 황실에서도 대대적인 위령제를 올렸다. 이 위령제의 영향으로 훗날 원혼을 달래주는 전문적인 神社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처럼 10∼11세기 섭관정치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일본의 대외관계를 보 면, 당시 일본은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고려에 대하여는 비교적 적극적이었다. 일본과 고려의 교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白河천홍 延久 5년 (1073;고려 문종 27) 7월의 일이다. 일본상인 王則貞과 松永年 등 42인이 고려 예성강에 입항하여 문종에게 螺鈿을 비롯하여 일본칼·거울·현석·문궤·화 병풍·궁시·수은 등의 일본 특산물을 헌상하였다. 이외에도 문종 및 선종대 에 걸쳐 정식으로 일본상선이 고려에 온 것은 20회에 달하였다. 그런데 도항 한 일본인들 가운데는 日本國使·對馬島使 등과 같이「使」를 칭하는 자가 많아 조공무역의 형식을 취한 교역이 大宰府體制에 기초하여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던 사무역의 형식과는 다른 공무역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하겠다.459)
8세기에 9차례 遣唐使를 파견했던 것과 달리 이 무렵 일본과 송의 관계는 정치적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송 상인과 일본 승려에 의한 민간 차원의 왕래는 부단히 계속되었다.460) 물론 그 사이 鳥羽천황 元永 원년(1118)에 송의 휘종은 일본조정에 致書하여 오랫동안 교류가 끊긴 것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통교의 뜻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수차례 조신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에 대한 회답을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송이 문화적으로 우수한 나라임에 분명하나 당시 송과 대치하고 있던 거란의 국력을 의식한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송에 대하여는 송 상인과 일본 승려를 통한 문화 교류를 유지하는 데 그친 것에 비하여 거란에 대하여는 이미 5대 혼란기부터 시작하여 堀河천황 寬治 5년(1091;요 道宗 大安 6;고려 선종 8)까지 鄭元·鄭心 및 승 應範 등 28인을 보내 방물을 바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