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혜종·정종대의 대중국관계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은 즉위 원년(944)에 廣評侍郎 韓玄珪와 禮賓卿 金廉을 후진에 보내어 왕위 계승을 통고하고 겸하여 거란을 격파한 데 대하여 축하하였다.541) 이에 이듬해 후진에서는 范匡政과 張季凝 등을 보내어 왕을 持節玄■州都督·上柱國·充大義軍使·高麗國王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官告·勅牒·國信物 등을 전하고 아울러 고려에서 보낸 보배와 수놓은 비단이 중국의 橦布542)보다 아름답다는 것과 병기와 갑옷 등이 매우 훌륭하여 고려왕의 정성에 깊이 탄복한다는 뜻을 전해왔다.543)
혜종 재위 2년간에 고려와 후진에서 각기 한 차례씩의 사행이 오고 갔는데 그 내용은 왕위계승을 알리는 것과, 새로운 왕에 대한 책명과 칙서를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당시 후진과의 관계는 事大外交였으며544) 조공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진 공무역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후진과의 외교관계는 혜종 2년(945;후진 開運 2)으로 끝나게 되고, 후진의 뒤를 이은 後漢과의 관계는 定宗 때부터 시작하게 된다. 후한과 고려와의 외교관계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차례 보이고 있다. 즉 정종 3년(948)에 처음으로 후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기록뿐이다. 그런데 연호를 사용하면서 사절 왕래의 기록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후한의 존속기간이 짧았고 (946∼950) 이 기간에 해당하는 고려왕 정종 역시 병약하였으며, 당시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가 매우 날카로워져서 光軍 30만을 조직하는 등 북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후한의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후한 고조 劉知遠은 天福 12년(947) 2월에 皇帝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월에 죽었으며, 그 뒤를 이은 隱帝 역시 乾祐 3년(950) 11월에 반란을 피하여 숨어 있다가 피살되었다. 결국 이러한 어수선한 후한의 사정으로 고려와의 원만한 외교관계는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