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광종대의 대중국관계
고려에서 정종의 뒤를 이어 광종이 즉위한 해에 후한은 곽위에 의해 멸망하고 이듬해(951;廣順 원년) 정월 後周가 건국되었다. 광종대의 중국과의 관계는 전후 시기에 비하여 매우 양상을 달리 하였다. 그것은 이 시기가 되면 고려가 점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어느 정도의 왕권강화로 인한 제도의 정비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 아래 양국의 외교관계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후주와의 관계는 광종 2년(951) 12월에 처음으로 후주의 연호를 사 용하면서 시작되었다.546) 이듬해인 광종 3년에는 고려에서 廣評侍郎 徐逢을 후주에 보내어 토산물을 선사하였다.547) 그런데 이에 대한 중국측 기사를 살펴보면 이 때 고려에서는 97명이란 많은 수의 인원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548) 하여튼 이렇게 매우 성대한 조공사를 맞아서인지 이듬해인 광종 4년에 후주에서 衛尉卿 王演과 將作少監 呂繼贇을 보내어 왕을 特進檢校大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史大夫·高麗國王에 책봉하였다.549)
광종 6년에는 大相 王融을 후주에 보내어 토산물을 전하였고, 다시 광평시 랑 筍質을 후주에 보내어 世宗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에 후주의 세종은 광종을 다시 책봉하였다.550) 이 후주의 책봉칙서를 고려에서는 이듬해인 광종 7년에 받게 된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후주에서 將作監 薛文遇를 보내어 왕을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로 책봉하는 동시에 百官의 衣冠을 중국제도와 같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때 후주의 前大理評使 雙冀가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551) 광종 7년의 후주와의 관계는 이후 고려의 제도개혁에 크게 영 향을 끼쳤고 광종이 국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이 때 백 관의 의관을 중국제도와 같이하기 시작한 것이 5년 뒤인 광종 11년에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하는 바탕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때 고려에 온 쌍기의 건의에 의하여 광종 9년에 처음으로 과거제가 실시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광종의 개혁 바탕에는 후주의 정치적 영향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개혁을 위해 새로운 제도, 선진제도의 수용은 불가피했고 따라서 중국의 投化人에 대한 우대가 있었다고 보여진다.≪고려사≫열전 雙冀傳에 보면 후주의 侍御 雙哲은 쌍기의 부친으로 쌍기가 고려에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광종 10년 回使 王兢을 따라 고려에 와서 佐丞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귀화인에 대한 우대는 역시≪고려사≫열전 徐弼傳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광종이 귀화한 중국사람들을 후대하기 위하여 신하들의 주택을 뺏어 중국인에게 배정하니, 서필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커서 반납하겠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귀화하여 온 사람들은 관직을 골라서 벼슬하고 집을 택해서 거처하는 반면에 世臣故家들은 도리어 거주한 곳을 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물론 귀화중국인에 대한 이러한 우대는 광종이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배경이 없는 신인을 과거를 통해 등용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광종이 새로운 제도와 개혁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종의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는 이후 후주와 매우 밀접한 외교관계를 갖게 하였다.
광종 9년(958)에는 후주에서 尙書水部員外郎 韓彦卿과 尙輦奉御 金彦英을 보내어 비단 수천 필로써 銅을 무역해 갔다.552) 그 이듬해 봄에 고려에서는 佐丞 왕긍과 佐尹 皇甫魏光을 후주에 보내어 좋은 말과 의복·활·칼 등을 보냈으며, 그해 가을에도 사신을 통해≪別序孝經≫1권,≪越王孝經新義≫8권, ≪皇靈孝經≫1권,≪孝經雌雄圖≫3권을 보냈다. 또 겨울에 사신을 후주에 보내어 구리 5만 근과 자색수정과 흰수정 각 2천 개를 전하였다. 이 해 후주에서는 左驍衛大將軍 戴交를 보내왔다.553)
광종 9년과 10년에 고려와 후주가 서로 國信物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공 무역을 크게 행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의 양국 관계가 단순히 정치, 외교적인 단계를 넘어 경제적인 면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교류 역시 양국의 국내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종 9년에 후주에서 동 을 무역하러 비단 수천 필을 가지고 왔을 때는 후주의 세종이 중국을 통일하려고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할 무렵으로 帳籍에 오르지 않은 無額의 사찰을 철폐하고 銅佛·梵鐘을 부수어 錢과 무기를 주조하던 때였다. 그리고 광종 10년에 고려에서≪별서효경≫등을 비롯한 전적을 보낸 것은 당시 중국이 당말·5대에 걸친 오랜 전란으로 많은 책들이 없어졌으므로 후주 조정에서 청구하였기 때문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55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와 5대와의 관계는 시종일관 평화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사대적인 책봉관계가 유지되었다고 하더라 도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양국은 비교적 자주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북방의 거란세력이 커감에 따른 위협이 양국을 하나의 동맹체로 묶을 수 있었으며, 두 나라의 국내사정도 우호관계를 갖도록 한 원인이 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후삼국의 통일과 왕권의 강화라는 점이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고려와의 우호관계가 거란에 대한 견제책으로나 국제질서 유지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546)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2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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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3년. |
548) | ≪■府元龜≫권 972, 外臣部 17, 朝貢 5, 後周 太祖 廣順 2년 정월. |
549)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4년. |
550) | ≪■府元龜≫권 965, 外臣部 10, 封■ 3, 後周 世宗 顯德 2년 11월. |
551)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7년. |
552)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9년. |
553) | ≪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0년. |
554) | 김상기,<고려 광종의 치세>(≪국사상의 제문제≫2, 국사편찬위원회, 1959), 90 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