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Ⅱ. 대외관계3. 북방민족과의 관계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 신분제도의 형성과 구조
            • (1) 신분과 신분제도
            • (2) 신분구조의 구성
            • (3) 신분계층의 편성 단위와 기준
          • 2) 관인계층
            • (1) 관인층의 특성
            • (2) 음서제와 과거제
            • (3) 공음전과 한인전
            • (4) 문반·무반과 남반
            • (5) 귀족의 계층구성
          • 3) 향리
            • (1) 임무
            • (2) 향역의 세습과 종사
            • (3) 향리의 신분
          • 4) 군인
            • (1) 군역
            • (2) 군역의 세습
            • (3) 군인의 신분
          • 5) 잡류
            • (1) 이직으로서의 잡류
            • (2) 이족으로서의 잡류
          • 6) 양인농민
            • (1) 공과·공역의 부담
            • (2) 생산계층
            • (3) 세업으로서의 농업생산
          • 7) 공장
            • (1) 공장의 유형
            • (2) 공장의 신분
          • 8) 향·소·부곡인
            • (1) 사회·경제적 지위
            • (2) 신분상 지위
            • (3) 신분상 제약의 의미
          • 9) 진척·역민
          • 10) 양수척 (화척·재인)
          • 11) 노비
            • (1) 신분상 특성
            • (2) 사회·경제적 지위
          • 12) 신분제도의 성격
        • 2. 가족제도
          • 1) 가족과 혼인
            • (1) 가족
            • (2) 혼인
          • 2) 재산의 상속
          • 3) 친족조직
            • (1) 성씨와 계보관념
            • (2) 부변·모변과 양측적 계보관계
            • (3) 촌수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
            • (4) 양측적 친속의 특성과 기능상태
          • 4)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
            • (1) 생활권과 친족관계망
            • (2) 계급내혼에 의한 구성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1) 사회정책
            • (1) 진휼정책
            • (2) 의료정책
          • 2) 사회시설
            • (1) 의창
            • (2) 상평창
            • (3) 제위보
            • (4) 동서대비원
            • (5) 혜민국·기타 기구
            • (6) 지방의 의료기구
            • (7) 민간의 의료사업
        • 4. 형률제도
          • 1) 율령의 내용
            • (1)≪고려사≫형법지에 대한 검토
            • (2) 고려율의 내용
          • 2) 사법제도
            • (1) 고려율의 적용문제
            • (2) 고려물의 형벌체계
            • (3) 고려물의 행형체계
            • (4) 행형의 실태
      • Ⅱ. 대외관계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당송변혁기 중국의 정치적 동향
            • (2) 북방민족의 흥기와 송의 동향
            • (3) 일본의 정치동향
          • 2) 고려의 북진정책
            • (1) 국초 북진정책과 발해유민 대책
            • (2) 국초 여진문제의 발생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1) 5대와의 관계
            • (1) 태조대의 대중국관계
            • (2) 혜종·정종대의 대중국관계
            • (3) 광종대의 대중국관계
          • 2) 송과의 관계
            • (1) 정치적 관계
            • (2) 문화적 관계
            • (3) 여송 교통로
            • (4) 경제적 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 (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 (2) 여진정벌과 9성
          • 2) 거란 및 금과의 통교
            • (1) 거란과의 통교
            • (2) 금과의 통교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1) 사절의 내왕
            • (2) 표류민의 송환
          • 2) 아라비아 및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 고려와 아라비아와의 관계
            • (2)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제2차 침입

 제1차 여·요전쟁 이후 비교적 평화 분위기가 지속되어 오다가 여·요 양국의 정세변화로 인해 갑자기 난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에서는 목종 12년(1009) 2월에 康兆의 정변으로 당시 실권자 金致陽 일파가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목종이 폐위·시해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유혈정변이 일어났다. 거란에서도 나이어린 聖宗 즉위 이래 27년간이나 섭정하였던 蕭太后가죽고 실권자였던 承相 耶律隆運이 물러남으로써 비로소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 때는 바로 요의 극성시대로 영토는 서쪽으로 天山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滿洲地域을 거의 아우렀으며, 북으로는 몽고 전지역, 남으로는 중국 남부지역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성종은 집권 후 청년왕답게 소태후섭정 시대보다 더욱 강력한 대외정복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뿐 아니라 송과의 유대를 끊게 하기 위해 강동 6주를 고려의 영역으로 인정하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밀리에 송과 통하며 연합해서 요를 협공하려는 고려의 태도에 불안감과 의구심을 갖게 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침략을 추진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마침 고려가 정변의 여파로 현종이 즉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정치적 혼란과 국방력 약화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기화로 전격적인 침략을 단행하였다.

 한편 고려는 현종이 즉위하던 해 2월에 거란과의 평화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司農卿 王日卿을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의 서거와 현종의 즉위사실을 알리었으며, 이어 4월에도 工部侍郎 李有恒을 파견하여 당시 실권자였던 소태후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였다.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 성종은 그 해 5월에 갑자기 강조의 목종 시해사건을 들고 나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직접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를 침략해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어618) 평화관계를 지속시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한편으로는 參知政事 康兆를 行營都統使에,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安紹光을 行營都兵馬使로, 少府監 崔賢敏을 左軍兵馬使로, 刑部侍郎 李昉을 右軍兵馬使로, 禮賓卿 朴忠淑을 中軍兵馬使로, 刑部尙書 崔士威를 統軍使로 삼아 병사 30만 군을 거느리고 通州(宣川)에 나아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다.619)

 거란에서 高正을 보내어 출병을 통고해 오자 고려에서는 참지정사 李禮均을 거란에 보내 화의를 요청하고, 이어서 冬至使를 보내는 등 성의를 보였으나, 거란 성종은 계획대로 11월 보병과 기병 40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義州)을 공격해 왔다. 이것이 곧 거란의 제2차 침입이다.620)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던 巡檢使 楊規와 鎭使 鄭成, 副使 李守和 등이 병사를 격려하며 굳게 지키니 거란의 40만 대군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였다.621) 그러자 거란의 성종은 포위를 풀고 군대를 양분하여 20만은 麟州(지금 신의주 남쪽)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통주로 남진하여 강조가 지휘하는 30만 대군과 격전을 벌였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배수진을 치고 미리 준비하였던 劍車를 동원하여 거란군 20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조가 그 후에 자만에 빠져 적을 업신여기고 대비를 소홀히 하다가 패함으로써, 강조와 李鉉雲 등 최고지휘관들이 포로의 몸이 되었다.622) 뿐만 아니라 盧頲·徐崧 및 楊景·盧■ 등 많은 참전 고관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지휘자를 일시에 잃은 고려군은 무력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거란군의 맹렬한 추격으로 인해 이 때 죽은 우리 군사는 3만여 명이나 되었다. 강조는 포로의 몸이 되었으나 거란 성종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623)

 고려군의 주력부대인 강조군을 격파한 거란군은 그들의 후방에 건재한 興化鎭의 楊規軍이 마음에 걸리어, 죽은 강조의 이름으로 항복을 권하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하지만 양규는 왕명을 받고 싸우는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며 이들의 요구를 물리쳐 버렸다.624)

 거란은 다시 앞서 사로잡아 간 노전과 馬壽 등에게 격문을 주어 통주로 보내어 통주에 있는 고려군의 항복을 권유시켰다. 그러나 오히려 중랑장 崔質과 洪淑 등은 노전과 마수를 사로잡아 포박한 다음 방어사 李元龜 등 여러 장수와 함께 성문을 굳게 잠그고 분전하였다. 이로써 성중의 백성들이 안정을 되찾고 다시 일치 단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거란군은 방향을 돌리어 12월 곽주를 점령한 다음 남하하여 청천강 유역을 유린하고 安北都護府를 빼앗은 기세로 西京(평양)에 침입하여 中興寺의 탑을 불살랐고, 이어 肅州(肅川)도 함락시켰다. 이어서 거란 성종은 친히 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하였으나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625)

 한편 거란군의 후방에서도 양규가 흥화진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곽주로 쳐들어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거란군을 무찌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구호하여 통주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626) 이와 함께 거란군의 후방 도처에서 고려군이 활발히 공격하고 있었고, 서경도 쉽게 함락되지 않자 거란 성종은 개성을 직접 공격하여 불리한 전국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거란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서경 서쪽을 공격해오자, 卓思政은 이를 두려워하여 후퇴하고 장군 大道秀는 굳게 항전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隘守鎭將 姜民膽은 統軍錄事 趙元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아 성문을 닫고 서경을 고수하였다.627)

 후퇴한 탁사정이 개성에 돌아와서 현종에게 서경의 참패상을 보고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예부시랑 姜邯■만이 홀로 오늘의 사태는 강조 개인에게 있는 것이므로 왕이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당장 적의 공격이 맹렬하니 우선 피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아뢰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왕의 피신을 권하였다.628) 이에 현종은 그날 밤 智蔡文을 호위로 삼아 왕비와 이부시랑 蔡忠順 등과 禁軍 50여 명을 거느리고 피난길을 떠났다.

 현종이 楊州에 이르렀을 때 河拱辰과 柳宗, 中軍判官 高英起 등이 달려와현종을 뵙고, 거란이 침입하게 된 이유가 강조를 토벌하는 데 있었으나 이제강조가 잡혀있는 만큼 사신을 보내어 청화하면 거란군이 회군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청화사신의 파견을 건의하였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과 고영기를 거란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를 청했다.629)

 거란의 성종은 현종이 보낸 講和使 하공진과 고영기와의 강화협상 끝에 현종의 親朝를 조건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하여 개성을 점령한 지 10일 만인 정월 11일에 철수하기 시작하였다.630) 거란의 철군이 고려의 강화요철에 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주로 피한 현종을 추격할 준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흥화진·귀주·통주 및 서경도 뺏지 못하고 급히 개경으로 진출하였으므로 거란군 배후에 있던 양규 등 사기가 높은 고려군에 의해 그들의 퇴로가 차단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철군을 결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거란의 성종은 퇴로의 안전을 위하여 먼저 서경에 군사를 보내어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탁사정은 이를 거절하고 100여 명의 적을 죽이고 이어서 철수해 오는 1천여 명의 기병도 격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거란 성종의 우려대로 귀주·통주·곽주 등지에서 교란작전을 계속했던 양규와 金淑興 등은 적군이 철수하여 갈 때도 치명적 타격을 가하였다.

 즉 귀주별장 김숙흥은 중랑장 保良과 더불어 거란군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죽였고 양규는 無老代에서 기습을 가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고 잡혀가던 고려인 3천여 명을 되찾았다. 계속하여 양규는 19일에 梨樹(義州지방)에서 접전하여 石嶺(義州지방)까지 추격해서 적군 2,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인 1천여 명을 탈환하였다. 22일에도 양규는 余里站(義州지방)에서 적군과 싸워 1천여 명을 죽이고 잡혀가던 고려인 1천여 명을 구해내었다. 특히 이 날 양규는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겼고 다시 퇴각해 오던 거란선봉과 艾田에서 접전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마침내 거란 성종이 직접 지휘하는 대군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아 양규는 김숙흥과 더불어 종일토록 역전분투하다가 군사가 다하고 화살이 떨어져서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이렇듯 양규가 적의 후방에서 외로이 버티며 일곱 차례의 전투를 감행하여 적군 수천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가던 고려인 1만여 명을 살려내고, 이외에도 軍馬와 무기를 포획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공훈을 세움으로써 거란군 퇴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631)

 양규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 직전에 있던 적군의 주력부대는 계속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수효가 더욱 줄어든 데다가 때마침 내린 폭우로 인하여 군대가 피폐하게 되어 무기를 유실한 채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는데, 이들 역시 장군 鄭成의 추격을 받아 익사한 자가 심히 많았다. 전황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항복하였던 여러 城이 모두 회복되었다.

 2월 29일 퇴각로에서 대참패를 당한 거란 성종은 압록강을 건너 來遠城으로 돌아가 여기서 황후와 동생의 영접을 받아 간신히 귀환하였다. 이 때 특기한 사항은 강동 6주를 비롯하여 압록강 이동의 여진인이 고려와 하나가 되어 거란군을 격퇴시킨 사실이다.632)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격퇴한 뒤에 전후 복구에 힘쓰는 한편,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비책 수립에 철저를 기했다. 그러는 가운데 외교적 수습을 통하여 여·요 양국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려하였다. 현종 2년(1011) 4월 고려는 공부낭중 王瞻을 거란에 파견하여 군대를 철수시킨 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였다. 또한 8월에는 호부시랑 崔元信을 거란에 파견하였고, 이어 10월과 11월에는 도관낭중 金崇義와 형부시랑 金殷傅를 거란에 파견하여 동지를 하례하고 성종의 생일을 축하하였다.633)

 거란의 성종은 고려원정에서 아무런 소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철군할 때 기습을 받아 병사와 군마 그리고 병기에 걸쳐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얻은 것이라고 해야 실현 불가능한 현종의 친조약속과 하공진·고영기 등의 인질밖에 없었기 대문에 재침의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617)≪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즉위년 4월 병술.
618)≪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원년 8월·9월.
619)≪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원년 10월 병오.
620)≪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원년 11월 신묘.
621)≪高麗史節要≫권 3, 현종 원년 11월 신묘.
622)≪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康兆 및 권 94, 列傳 7, 楊規.
623)위와 같음.
624)≪高麗史≫권 94, 列傳 7, 楊規.
625)≪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원년 12월 경술·임자·계축·갑인·신유.
626)≪高麗史節要≫권 3, 현종 원년 12월 경신.
627)≪高麗史節要≫권 3, 현종 원년 12월 기미.
628)≪高麗史≫권 94, 列傳 7, 姜邯■.
629)≪高麗史≫권 94, 列傳 7, 河拱辰.
630)김상기, 앞의 글, 146쪽 참조.
631)≪高麗史≫권 94, 列傳 7, 楊規.

≪遼史≫권 15, 本紀 15, 聖宗 統和 29년 정월조에도 달아나던 遼軍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632)≪文獻通考≫권 487, 四裔考 4, 女眞.

≪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633)≪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4월 을축·8월 을축·10월 을축·11월 임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