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윤이·이초의 옥과 반이성계파의 확대
尹彛·李初의 獄은 공양왕 2년(1390) 5월 明에 파견되었던 王昉과 趙胖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 계기가 되어 이색·우현보 등 반이성계파 33인이 彛初黨에 몰려 처벌된 사건이다.
① (명) 禮部에서 신 등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사람 尹彛와 李初가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의 李侍中이 (王)瑤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요는 宗室이 아니라 곧 그의 姻親입니다. 요가 이시중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上國을 칠 것을 꾀하므로 재상 李穡 등이 반대하였더니, 곧 이색 등 10명을 살해하고, 禹玄寶 등 9인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그래서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고하고, 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해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예부에서는) 윤이와 이초 등이 기록한 이색 등의 성명을 보여주면서 “너희가 속히 귀국하여 왕과 재상들에게 말하여 尹·李가 기록한 사람들을 잡아다 물어보고 나에게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5월 계사).
② 무술일 밤에 金宗衍이 도망하였으므로 경내를 크게 수색하고 드디어 禹玄寶·權仲和·慶補·張夏·洪仁桂·尹有麟을 순군옥에 가두고, 또 崔公哲 등 11인을 옥에 가두었으며, 이색·李琳·禹仁烈·李仁敏·鄭地·李崇仁·權近·李種學·李貴生 등은 청주옥에 가두었다(≪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5월 무술).
이와 같이 彛初의 옥에 대한≪高麗史≫기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사료 ①은 이초사건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왕방과 조반이 명에 갔을 때 명의 예부로부터 尹·李가 명제에게 고소한 사실을 듣고 귀국하여 공양왕에게 상계한 내용이다. 사료 ②는 윤·이 등이 명에 보고했다는 명단 안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 김종연이 처벌이 두려워 야밤도주함으로써 이 사건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색·우현보·우인열·정지·이임·경보·이숭인 등이 하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의 숙청을 초래한 왕방과 조반의 보고내용 즉, 사료 ①의 내용은 다시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는 것, ⓑ 이성계가 병마를 동원하여 명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 ⓒ 이 때문에 이색 등이 죽임을 당하거나 원지에 유배되었기 때문에 ⓓ 윤이와 이초를 명에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이성계일파를 토벌해 줄 것을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명황제는 윤이와 이초의 호소가 무고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조반으로 하여금 귀국하여 왕 및 재상과 협의하여 윤·이가 제출한 명단의 인물들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보고되자 헌부와 형조에서는 잇따라 소를 올려 ‘彛初黨’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왕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0609) 그런데 池湧奇로부터 ‘彛初의 명단’ 자신의 이름이 실려 있어 위태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김종연이 야밤에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큰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처음 고발한 조반이 그 후 ‘개국 2등공신’에 오를 만큼 이성계의 우익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 역시 김저사건처럼 이성계파에 의해 확대 내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0610)
이성계는 공양왕을 즉위시키면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장단에 은거해 있던 이색이 대궐로 나와 하례하자 왕은 그에게 자신을 도와달라 간절히 호소하면서 이색을 판문하부사, 변안렬을 영삼사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까지 이성계세력이 배제했던 이색 등이 공양왕과 밀착될 가능성을 예측하게 해준다. 더구나 9공신을 무함하는 말까지 들리면서 사태는 이성계세력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즉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세력의 대간들은 이초의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소위 ‘禑昌黨’(신돈의 아들인 우·창을 옹립하여 왕실의 맥을 끊으려는 자)을 모두 살해하도록 왕에게 끊임없이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공양왕은 오히려 우창당의 편에 서서 원만한 해결을 강구할 뿐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이성계는 자기 세력의 결속을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우창당의 처리문제를 놓고 공양왕과 충돌이 한창이던 동왕 2년 4월 회군공신을 정하여 포상을 거행한 것도 이러한 정국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에 대한 결속과 보장책의 일환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0611)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숙청할 계기를 찾고 있었던 중 마침 발생한 것이 바로 윤이·이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33인이 연루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색·조민수·권근·이숭인 등 13명은 이미 ‘우창당’으로 탄핵되어 처벌받았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이초당’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우창당’에 대한 처리가 이성계세력이 의도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0612) 또한 21명이 새로 ‘이초당’에 추가된 것도 이성계세력의 정국주도에 반대하는 세력이 그 만큼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가운데 19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모두 무장세력으로서 활동한 경험이 있거나 무관직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성계에 반대하는 무인들의 반발이 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0613)
그런데 11월에 다시 ‘김종연사건’이 발생하고 또 한차례 반이성계파가 숙청된다. ‘이초당’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탈출한 김종연이 서경에 와서 서경천호 尹龜澤·楊百之 등에게 군사를 청하여 개경의 沈德符·池湧奇·鄭熙啓·朴葳·尹師德·李沃·李彬·李茂·陳乙瑞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이성계 등 9공신을 살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이다.0614)
이 ‘김종연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는 무장출신이 심덕부·지용기·박위·윤사덕·이무·진을서·이옥 등 7명이 있고, 하급무인은 金兆府·張翼·魏种 등 14명이었다. 특히 공양왕 추대의 공신이기도 한 심덕부·지용기·박위 등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 등은 이성계세력 내부, 특히 무장세력 내부에 분열과 대립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발에 대하여 이성계세력은 김종연을 참혹하게 처형하여 각 지방에 조리를 돌림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반발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며, 하급사병까지 철저하게 숙청하는 등 매우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아울러 ‘종연당’ 처벌 후 여러 元帥의 인장을 모두 회수하여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집단을 흡수하였고 아울러 공양왕 3년 정월에는 이성계가 서울과 지방의 군사를 모두 통솔할 수 있게 되었다.0615) 뿐만 아니라 한달 뒤에는 우창당·이초당에 빠져 있던 지용기마저 역모죄로 몰아 杖流하였으니 이로써 9공신 가운데 이성계와 견줄 만한 능력을 가진 무장은 하나도 남지않게 되었다.0616)
0609) | ≪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2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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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 |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하여 이색 등 구세력이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궁지에 몰린 구세력을 지지해 온 일부 인물들이 조작한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趙啓纘, 앞의 글, 444∼446쪽). 물론 이색 등은 이미 창왕 때 왕의 친조를 추진하여 명에 의지하여 이성계세력을 견제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때에도 명에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건에 연루된 이색·조민수·이임·변안렬·이숭인·권근·이종학·이귀생·우현보·우인렬·정지 등이 이미 모두 귀양가 있어 이와 같은 사건을 꾸밀 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이초사건 후 청주에서 큰 수재가 났다고 하여 곧 청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초사건 관련자를 석방한 사실에서도 이 사건이 무고였음을 이성계파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劉璟娥, 앞의 책, 108쪽). |
0611) | 朴天植, 앞의 글(1979) 참조. |
0612) | 劉璟娥, 앞의 책, 103쪽. |
0613) | 劉璟娥, 위의 책, 102쪽<표 7>참조. |
0614) | ≪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周鼎 附 宗衍. 李相佰, 앞의 책, 78∼87쪽. |
0615) | ≪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2년 11월·3년 정월. |
0616) | ≪高麗史≫권 114, 列傳 27, 池湧奇. 劉璟娥, 앞의 책, 1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