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능적 내용
가. 처용희
處容戱는 궁중에서 행해진 탈춤으로 제석 때 궁중의 잡귀를 쫓아내기 위해서 驅儺儀式으로 열렸다. 처용의 명칭은 신라 헌강왕 때 동해 용왕의 아들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헌강왕 앞에 동해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가무를 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1051) 처용무는 이 때 추어진 것인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궁중의 儺禮 때에만 행해진 것이 아니고 연회에도 잡희로서 추어졌다.
임인일에 內殿에서 간소한 연회할 때 承宣 蔡松年이 ‘僕射 宋景仁이 평소에 處容戱를 잘한다’라고 하니 景仁이 취함을 타서 처용춤을 추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3년 2월 임인).
또한 충혜왕 4년(1343) 8월에는 원의 사신을 맞이하여 妙蓮寺 북쪽 봉우리에 올라 음악을 베풀었는데 승려 中照도 춤추고 왕 또한 춤을 추었다. 이 때 좌우에서 나온 사람들이 처용희를 하기도 했다.1052) 그런가 하면 우왕 12년(1386) 정월에는 왕이 직접 처용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등1053) 처용희는 주로 궁중에서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李齊賢의<小樂府> 중 6번째인 처용희는 내력과 분장, 춤사위를 묘사하고 있어1054) 당시 처용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처용이 고려 때 들어와서는 늙은이로 변모하여 나타나고 고려 말에는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처용희는 궁중의 宴樂舞나 사신접대, 임금이 직접 추는 등의 궁중놀이였으나 후기에 이르면 잡희로서 민간 속에서도 연희되었음을 파악케 된다.1055)
고려 말 李詹(1345∼1405)은 경주에서 춤이 추어지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를 지었고, 李崇仁이나 李穀의 시에서도 처용희를 엿볼 수 있다.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