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저포희
「樗蒲戱」는 다섯 개의 나무를 윷가락과 같이 만들어서 던지고 놀던 오락으로 당대 李臯羽의≪五木經≫에서는「五木」 또는「玄白判」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윷놀이와 다소 다른 오락으로 보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백제 때에도 있었다.1132)
고려 때에도 저포희가 계속 되었던 사실은 이색의 시에 나타나는데,1133) 대개 연말 밤샘하면서 심심풀이로 노소가 함께 즐겼던 민속오락이라 하겠다.
그런데「저포희」와 윷놀이 즉 擲柶戱는 5목과 4목의 차이, 윷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생한 고유놀이로 백제 성씨와 관련되는 점, 놀이방법에서 전혀 별개라는 점 등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1134) 또한 저포는 3백60子의 놀이단 위에 여섯 말을 붙이고 다섯 木片을 던지나 우리의 윷놀이는 29개의 동그라미 윷판에 네 말을 붙이고 네 목편을 던지므로 윷놀이와 저포가 다르다고 한 견해도 있다.1135)
그러나 고려 때 저포희라 한 것은 오늘날의 윷놀이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풍속유래는 명절에 중요하니
흰 머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들과 즐기네
둥근 것 28과 모난것 한 판에
변화가 무궁하니 바르고도 또한 기이하다
(李穡,≪牧隱詩藁≫권 35, (略)樗蒲戱傍坐觀之).
위의 구절 ‘둥근 것 28과 모난 것 한판’은 윷판의 한가운데 方을 중심으로 한 28, 즉 29의 동그라미를 말한 것으로 오늘날 윷놀이판과 같다. 이것과 관련하여 金文豹의 柶圖說과 李圭景의 柶戱辨證說에 나타난 설명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1136) 두 견해에 따르면 고려의 저포희는 이미 중국의 저포희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놀이되던 것으로 보인다.
저포희가 중국식 명칭이라고 한다면 중국에서 들어온 이 오락이 고려 때 윷놀이 즉 柶戱와 병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李瀷은 사희를 ‘高麗의 遺俗’이라고까지 말하고 있고1137) 최영년이≪海東竹枝≫에서 고려 궁중에서 시작한 것으로1138) 논단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조와 밀접하다고 하겠다. 또≪訓蒙字會≫에서도 柶(윷)字 註에는 저포라 일컫고, ‘樗 뎌, 蒲 표’라 한 내용으로 볼 때에 민간에서는「윷」이란 명칭의 고유어를 썼으며 종래 중국의 저포희와는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고 하겠다.
윷놀이를「저포희」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초기에는 저포희로서 놀이되다가 차츰 고유성을 갖춘 윷놀이로 정착된 때가 고려시대가 아닐까 한다. 윷놀이는 단순한 오락에 그치지 않고 길흉을 판단하고 풍흉을 미리 알고자 하는 占卜的 주술로 윷점을 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