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수전패와 무수전패
공민왕 3년(1391) 5월에 제정된 科田法에 보면 경기와 동·서 양계를 제외한 6도의 閑良官吏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조지의 많고 적음에 따 라 관품 고하에 관계없이 5결 또는 10결씩의 군전을 지급하고 군전을 받은 한량관리들은 의무적으로 三軍總制府에 숙위하게 하되 무단히 100일 이상 숙위에 응하지 않을 때는 그 군전을 신고하는 사람에게 준다고 하였다. 군전을 받는 한량관리란 전직관리나 관직을 대기하고 있는 한산한 상태에 있는 관리를 말하며 수조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5결 또는 10결의 군전을 준다고 한 것은 기왕에 한량관리들이 가지고 있던 수조지 중 5결 또는 10결만 남겨 놓고 몰수한다는 뜻이다.146) 과전법에서는 私田京畿의 원칙에 따라 외방에는 수조지를 가급적이면 지급하지 않으려 하였으면서도 향리의 外役田을 비롯한 각종 有役田과 군전만은 제한적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흥관료들은 관직과 이에 따른 과전 또는 功臣田·別賜田 등을 차지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비판적이거나 여기에서 소외된 한량관리들은 관직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전제개혁에 의하여 그들이 고려시대에 지급받고 있었던 수조지조차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한량관리들의 불평은 높았을 것이고 이들의 향배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군전을 주고 그 대가로 居京侍衛케 한 것도 이들의 불만을 다소나마 완화시키고 이들의 동향을 정치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이것은 국가의 府兵을 튼튼히 하는 길도 되었다. 넉넉한 이들에게 무기·말·식량 등을 스스로 부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전을 받은 受田品官들은 이러한 정부의 조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와서 시위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아들·사위·동생·조카·노복으로 대신하게 하거나, 익명서를 내어 정부의 시책과 당국을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70세 이상의 고령자나 질병자, 생원·진사의 還鄕을 허락하고 아들·사위·동생·조카의 侍衛代立과 軍田遞受를 용인하게 되었다. 물론 수전품관의 거경시위의 완화가 그들의 저항 때문에 취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태종조에 이르면 갑사·별시위 등 궁성숙위를 위한 禁軍이 설치되고 또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군사로서 적합치 않은 노약자들을 그들의 아들·사위·동생·조카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전을 받은 수전품관들이 소속될 병종이 애초부터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종친과 대신들이 6도병을 나누어 거느리고147) 군병들도 각 장수들이 6도의 시위패를 징발하여 편제한 사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48) 그리고 궁성숙위는 고려 말에 새로 설치된 成衆愛馬가 담당하고 있었다.149) 그러나 이러한 사병과 성중애마는 수전품관이 입속하는 병종은 아니었다. 물론 수전품관들이 입속하는 수전패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종 1년(1401) 11월에 承樞府가 왕명으로 부병과 수전패를 擊毬場에 모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는 이미 수전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전패에는 비단 군전 수급자들만이 소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전을 받은 전직관료들도 자원에 의하여 수전패에 편제되었다.150) 과전을 받은 양반관료들은 퇴직하더라도 과전을 그대로 받고 있었지만 군역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군전은 5결 또는 10결밖에 안되는 데 과전은 그보다 많았으므로 같은 수전패에 속하면서도 군전을 가진 자가 과전을 가진자보다 불리하였다. 이에 태종 5년(1405) 4월에는 과전을 가진 자도 군전의 예에 따라 5결 또는 10결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전을 받지 못한 서울의 양반관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군전은 과전처럼 조선 초기에 계속적으로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군전은 공양왕 3년(1391) 5월 과전법이 실시될 때 한 번 주어졌을 뿐 그 후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기왕에 주어진 군전은 수전패의 아들·사위·동생·조카가 대신할 때는 물려줄 수 있었으므로 군전이 당장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군전을 없애자는 주장도 계속 있었다. 군역을 지는 양인에게는 한 뼘의 토지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늙어서 쓸모없는 한량관리들에게 군전을 주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이 당장 실천에 옮겨졌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 후 군전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전이 소멸되어 갔다면 수전패의 중심은 과전을 받은 전직관료들이 었을 것이다.
군전이나 과전을 받지 못한 전직관료들은 무수전패에 편제되었다. 양반관료라 해서 누구나 과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전의 절대량을 묶어 놓고 과전을 반납해야 할 사람이 반납하지 않을 경우 이를 고발하는 자에게 그 과전을 주는 陳告遞受法에 의하여 이를 수급하는 것이 국가의 정책이었으므로 그 가운데는 과전을 받지 못하는 관료들도 많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무수전패를 구성하였다. 무수전패에 대한 기록은 태종 4년(1404) 8월에 처음으로 보이나 사실상 무수전패도 수전패와 함께 作牌되었을 것이다.
수전패와 무수전패는 태종 원년 11월부터 서울에 와서 시위하는 것이 의무제에서 지원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시위근무를 하지 않는 자는 지방군에 편제하고 그 군전은 몰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늙거나 병든 자는 그 군전을 아들·사위·동생·조카에게 물려주고 시위근무를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이 시기에 이르러 새 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어느 정도 굳어져 갔고 시위업무도 새로 생긴 갑사·별시위·내금위·내시위에서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수전패는 태종 9년 12월에 都城衛로 개편되었다.151) 그러나 무수전패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무수전패는 1년에 봄·가을로 두번씩 검열을 거칠 뿐 시위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州鎭軍에 편입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신이 올 때 징발되어 시위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무수전패도 도성위에 편제되었다. 이 경우 수전패는 長番인 데 반하여 무수전패는 1년에 3개월씩 번상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무수전패의 지위 격하를 의미한다. 무수전패는 양인들의 京侍衛牌와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 3년(1457) 3월에 무수전패는 경시위패 와 통합되었다.
한편 수전패는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근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가자 세 조 5년 3월에는 虎翼衛로 재편성되어 虎賁衛에 소속시켰다가, 그 해 8월에 平虜衛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세조 8년 7월에는 다시 과전이 있는 전직관료는 奉忠衛, 과전이 없는 전직관료는 拱宸衛를 만들어 각각 소속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세조 12년에 職田法이 실시되어 관직에서 물러나면 과전을 반납해야 하였기 때문에 전직관료들도 양인과 마찬가지로 正兵에 편입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