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양반 직업군
조선 초기의 양반 직업군으로는 갑사·별시위·내금위·내시위·겸사복·선전관 등이 있었다. 갑사는 정종 2년(1400) 12월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왕자·공신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재편한 직업군인의 병종이었다. 갑사의 수는 처음에 2천 명에서 점점 늘어나 ≪경국대전≫에는 14,800명으로 늘어났으나 복무기간은 점점 짧아졌다.152) 이것은 군액 증대로 인한 자연증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녹봉을 절약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특수군 중에 수가 가 장 많았던 갑사 전원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 가에서는 태종 때부터 갑사 병종을 번상 병종으로 바꾸고 상번 갑사에 한하여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 이후로 다시 갑사의 정액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자 갑사직은 체아직으로 바뀌고 그나마도 고위직은 줄고 하위직이 늘어났으며 녹봉아닌 급료·월봉을 주게 되었다.153)
갑사에는 步甲士와 騎甲士가 있었는데 수전패와 마찬가지로 갑사는 馬兵 이 주가 되어 있었다.154) 마병은 말을 준비해야 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갑사취재에 응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산이 넉넉한 양반 자제들이 많이 입속하였다.155) 뿐만 아니라 갑사는 군직이기는 하지만 무반직이었다. 문반직 만은 못하지만 갑사는 관직이었으므로 양반 자제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갑사는 중앙군의 기간 병종이었기 때문에≪續六典≫에 2∼3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사람은 奉足 2호, 4∼5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사람은 봉족 1호, 6∼7결을 가진 사람은 봉족을 주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갑사는 양반자제들이 많이 입속하는 양반 병종이었다고 할수 있다. 또한 갑사는 국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위병이었기 때문에 工商賤隷와 같은 천인이나 천인에서 양인으로 면천된 자는 입속할 수 없었다. 갑사가 비록 군직이기는 하지만 양반직의 일부였으므로 가풍있고 문지가 좋은 양반자제들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양반 자제뿐 아니라 종친들도 갑사에 임명되었다. 갑사는 과전을 받지 못하는 체아직이기는 하였지만 만기가 되면 서반 실직을 받을 수 있었다.
별시위는 정종 2년(1400) 12월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司楯·司衣 등 고려 말 이래의 성중관을 혁파하는 대신 설치한 시위군이었다. 따라서 별시위는 가끔 성중애마라고 별칭되기도 하였다.156) 별시위의 정액은 세종 원년(1419)에 200인에서 세조 4년(1458)에 5,000인으로 늘었다가 ≪경국대전≫에는 1,500인으로 줄었다.
별시위에는 갑사와 마찬가지로 양반 자제가 많이 들어갔다. 별시위도 말 을 마련해야 하였기 때문에 노비를 소유하고 자산이 넉넉한 양반 자제들이 많이 들어갔다. 특히 세종 28년 정월에 의정부는, 서울과 경기는 訓鍊觀 提 調가, 외방은 각 도 관찰사가 별시위 지원자의 가계를 조사하여 노비 10구 이상을 소유한 넉넉한 양반 자제만을 뽑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별시위에는 助丁 3인을 지급하였다. 별시위에는 부실한 양반자제들이 입속하였기 때문에 조정은 지급하게 되어 있지 않았으나 세조 때 군액이 늘어나면서 반드시 넉넉한 양반으로 다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일시 조정을 지급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규모가 커서 양인들도 봉족을 받고 입속할 수 있었던 갑사와 다른 점이라 하겠다. 별시위에도 체아직이 주어졌으나 武才가 뛰어난 사람은 수령이나 만호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갑사나 내시 위도 마찬가지였다.
친군위는 태종 초에 태조 휘하에 있던 함경도 출신의 군사를 우대하기 위하여 조직된 숙위군이었다. 이들의 지위는 내금위·겸사복·별시위와 비슷하 였으며 국왕의 측근 시위군으로서 왕실의 정보기관 노릇도 한 것 같다.157) 친군위의 정액은 40인이었는데 20인은 함경남·북도 사람으로 채웠다. 20인의 친군위 당번인원 전원에게는 체아직이 주어졌으며, 취재시험은 함경도 절제사가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친군위는 이성계의 함경도 출신 직속부하들이었기 때문에 양반 병종으로 격상시켜 대우한 것이다.
내금위는 선전관·겸사복·공신적장과 함께 5위에 소속되지 않은 장번 무 관의 병종이었다. 내금위는 태종 7년(1407) 10월에 종래 왕실숙위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內上(廂)直을 개편하여 설치한 국왕의 친병이었다.158) 내금위는 국왕을 측근에서 시위하는 친병이었으므로 태종의 手下兵 중에서 함경도 자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관료 체제가 갖추어져 감에 따라 세종조부터는 내금위병도 양반 자제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내금위는 동반의 集賢殿과 비견되는 서반군직 중의 요직이었기 때문에 양반 자제들이 이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내금위에는 서울의 양반 자제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지방의 양반 자제들이 입속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서울의 양반 자제들은 충의위·충찬위·충순위 등 귀족군에 입속할 기회가 많고 쓸만한 인재는 거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계인이나 여진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들 중 자원자를 내금위에 입속시키기도 하였다.159) 내금위에는 같은 양반 자제라도 가산이 넉넉하고 용모가 준수하며 무재를 갖춘 사람을 골라서 입속하게 하였다. 내금위에 속한 사람들 중 가산이 넉넉치 못한 사람에게는 復戶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내금위는 국왕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친병이었으므로 수는 적으나 精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금위의 정액은 태종조에 60인이던 것이 ≪경국대전≫에는 190인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선전관 8인, 겸사복 50인 다음으로 적은 수이다. 정3품이 限品인 내금위는 전원 체아직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첨절제사·만호·변방수령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만호직과 같은 외임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였다. 만호직과 같은 외임에 임명되면 녹봉도 없고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고생이 막심하였던 까닭이다.160) 그리하여 첨절제사·만호를 지낸 사람은 수령을 거치지 않아도 4품 이상으로 加階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금위는「宿衛軍」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병종이었다 그러므로 숙위군사를 뽑을 때는 내금위에 불합격하면 별시위에, 별시위에 불합겪하면 갑사에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취재시험에서의 합격선인 矢數를 비교해 보아도 내금위는 10시 이상, 별시위는 6시 이상, 갑사는 5시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세 병종의 격이 내금위·별시위·갑사 순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시위는 태종 9년(1409) 6월에 설치된 숙위군이었다. 그러나 그 직능이 내금위와 비슷하다 하여 세종 6년(1424) 5월에 이를 내금위에 통합시켰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내시위도 내금위와 마찬가지로 양반 자제들이 입속할 수 있었던 양반 병종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겸사복은 내금위와 쌍벽을 이루는 친병으로 내금위가 왕이 있는 궁궐의 동북쪽을 지키는 금군이었는데 비하여 겸사복은 대내의 서북쪽을 지키는 금 군이었다. 겸사복에 관한 기록은 세종 7년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전부터 있어온 것 같다.161) 시취 방법·한품(정3품)이 내금위와 같았으며 52인 전원에게 체아직을 준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겸사복은 사복시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특수 병종으로서 내금위보다 서반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겸사복도 내금위와 직능·대우가 비슷하고 양반직의 성격이 강하였던 半官半軍의 양반 병종이었다.
선전관은 그 수가 8명에 불과하였지만 장번 무관으로서 부장과 함께 무반 청요직에 해당하였다. 선전관은 왕명을 전달하는 傳令武官으로서의 중요한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선전관은 또한 시취규정도 한품도 없었으며 전원에 게 정3품까지의 체아직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선전관은 군직이라기 보다는 무관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양반 자제들이 가장 선망하는 양반 병 종이었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중앙 숙위군을 구성하는 직업군인은 5위에 소속되는 갑사·별시위·친군위 등의 번상 위병과 5위에 소속되지 않고 국왕의 측근에서 시위하는 내금위·겸사복·내시위·선전관 등의 장번 친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번상 위병이나 장번 친병을 막론하고 양반들이 주로 입속하는 양반 병종이었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양반자제 중에서도 가산이 넉넉하고 용모와 무재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였다. 이 점이 시험없이 조상의 음덕으로만 입속하는 충의위·충찬위·충순위 등의 귀족 숙위군과 다른 점이다. 이들에게는 정3품의 체아직이 주어졌으며 만기가 차면 다른 관직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152) | 李成茂, 앞의 책(1980), 23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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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 위와 같음. |
154) | ≪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3월 기해. |
155) | ≪成宗實錄≫권 33, 성종 4년 8월 계해. |
156) | ≪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원 신해. ≪世宗實錄≫권 16, 세종 17년 7월 병신. |
157) | 千寬宇, <朝鮮初期 五衛의 兵種>(≪史學硏究≫18, 1964), 67쪽. |
158) | ≪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10월 신축. |
159) | ≪大典後續錄≫권 4, 兵典 雜令條에는 아예 함경남·북도 각 5인, 평안도 10인을 내금위에 서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160) | 車文燮, <鮮初의 內禁衛에 대하여>(≪史學硏究≫18, 1964), 107쪽. |
161) | 閔賢九,≪韓國軍制史-朝鮮前期篇-≫(陸軍本部, 1968), 7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