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양반의 수조지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 5월에는 과전법이 실시되었다. 과전법은 조선 초기 국가관리들의 수조권을 규정한 법제였다. 국가에서는 王土思想에 입각하여 모든 토지로부터 생산물의 10분의 1을 租로 받았다. 이를 什一租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국가에게 귀속되는 토지를 公田, 개인(관리·공신)에게 귀속되는 토지를 私田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국가수조지를 공전, 개인수조지를 사전이라 하였다. 이 때 개인수조지의 대부분은 과전·공신전·별사전·군전 등 양반수조지였다. 양반관료들은 국왕의 신료로서 국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여야 하였고 국왕은 이들의 충성과 복무의 대가로 일정한 녹봉과 개인수조지 등 경제적 반대급부를 제공하고 관료로서의 사회적 권위를 보장해 주었다. 물론 개인수조지에는 外役田·紙匠田 등 비양반 수조지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양적으로 양반수조지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적었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세종 27년(1445)에는 대부분 혁파되었으므로 개인 수조지라 하면 양반수조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양반수조지 중에서도 과전이 가장 중요하였다. 과전은 공신전·별사전·군전과는 달리 모든 관료에게 지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전은 또한 受田者가 관직을 가지고 있을 때뿐 아니라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지급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도 守信田·恤養田이라는 명목으로 그의 처 자에게 계속 지급되었다. 따라서 과전은 世祿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었 다. 양반 世家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음서제와 아울러 녹 봉 이외에 경제적 반대급부로서 세록으로서의 과전을 더 지급하였던 것이다.이 음서의 世官制와 과전의 世祿制는 고려·조선 초기의 양반관료제가 가지 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였다. 중국에서 봉건제가 무너지고 군현제가 실시 됨에 따라 量祿分田制는 관제에 있어서의 음서제와 전제에 있어서의 세록제 로 바뀌어 갔다. 이것은 고려·조선 초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음서제 는 정치적인 면에서 관료 자손들에게 관직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는데 비하여 과전제는 경제적인 면에서 관료들의 세록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관제로서의 음서제는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세록제로서의 과전제는 국가의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어 갈수록 축소되어 가다가 명종조에 없어지고 말았다.167)
과전은 고려시대부터 職事를 기준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직사를 기준으로 과전을 지급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官品(散官)은 높은데 직사(실직)는 낮을 수도 있고 관품은 낮은데 직사는 높을 수도 있었다. 전자를 行職, 후자를 守職이라 하였다. 관직세계의 질서로 보아서는 관품을 기준으로 과전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에 세종 13년 정월에는 관품을 기준으로 과전을 지급하는 給田法을 마련하였다.168) 이것은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법문화되어 있다.
과전은 급전자가 죽은 뒤에도 그 아내나 자식에게 수신전·휼양전이라는 명목으로 계속 지급되었다. 수신전은 자식이 있는 아내에게는 과전의 전부 를, 자식이 없는 아내에게는 그 3분의 1(원래는 2분의 1)을 주었고, 휼양전은 5결만 지급하도록 하였다. 과전의 세록적인 의미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을 실시할 당시에 북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총 전결수는 657,985결이었고, 이 중 경기도의 토지는 140,142결이었으며, 태종 2년(1402) 2월의 6道田 80만 결 미만 중 경기도의 토지는 149,300여 결이었고 그 중 과전은 84,100결이었다. 이것을 보면 과전의 총 결수는 경기도 토지의 80%, 전국 토지의 15%나 되었다. 관료제 사회에서 국왕은 관리들에게 그 충성의 대가로 녹봉만 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많은 토지가 과전으로 배당되어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까지 아직도 分封制의 유제가 남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고려 말 李成桂 일파가 私田改革을 단행할 때 과전을 아예 없애려고 하였으나 건국 초창기의 양반관료들의 저항이 두려워 고려시대보다는 대폭 축소된 규모로 과전을 존속시켰던 것이다. 과전을 없애자는 주장은 태종 14년(1414) 8월 사전을 하삼도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을 때 河崙에 의하여 주장된 바 있으며169) 세종도 과전제를 없애고 恩賜米制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과전제를 없앤다는 것은 양반관료들의 불이익이 크기 때문에 반대에 부딪히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과전을 한꺼번에 없애기 보다는 사전경기의 원칙·진고체수법·사전 세전의 제한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과전을 점차 줄여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3년(1403)의 84,100여 결이었던 과전이 세종 22년(1440)에는 68,000여 결로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세조 12년(1467)에 직전법이 실시됨으로써 과전은 현직에 있는 관료들에게만 지급되게 되었다. 이에 과전의 결수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과전은 세록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현직에 있는 관료들에게 녹봉 이외에 지급하는 특혜로서의 수조권 지급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과전법이 혁파되고 직전법이 실시됨에 따라 양반관료들의 수조권이 재직 기간으로 단축되었다. 이에 양반관료들의 田租의 착취가 더욱 심해지게 되 었다. 직전의 전주들은 전조 이외에 전호들로부터 草價(草 1束에 米 1斗)를 받았는데 전조와 초가를 합하면 본래의 전조의 두 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과전의 전호로부터 직접 職田稅를 받아들여 전주들에게 나누어 주는 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직전의 수조권은 토지와 유리된 祿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직전의 관수관급제가 실시되자 직전에 대한 전주의 직접적인 지배는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직전세까지도 그 후 흉년이나 군자비축 등의 명목으로 자주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러다가 명종조에 王子科田을 제외한 모든 과전이 혁파되고 말았다.170)
한편 조선 건국 초기에는 많은 공신들이 양산되었다. 中興(1389)·開國 (1392.8)·太祖原從(1392.10)·回軍(1393.7)·定社(1398.10)·佐命(1401.1)·太宗原從(1411.11) 공신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많은 공신전과 별사전이 주어졌다.171)
조선 건국 초기의 10년간에 지급된 공신전의 총액은 약 45,100여 결이나 되었다.172) 이는 태종조의 과전 총액인 84,100결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이들 공신 중에는 과전·공신전·별사전을 거듭 받아 1,000결이 넘는 수조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공신전 증대는 이를 충당할 토지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軍資田을 떼어 공신전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군자전의 감축은 군비를 소홀히 할 염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공신전으로 지급된 토지를 군자전으로 환원하고 공신전은 줄이려고 하였다. 예컨대 개국·정사·좌명의 3공신 이외의 공신들에게 주어진 공신전의 세전을 금지한다든가 원종공신전을 받은 사람은 회군공신전을 거듭 받지 못하게 한다든가 공신전에서도 전에는 면제되어 있던 전세 2두를 받아들인 것 등이 그러한 조처였다. 그뿐 아니라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공신 의 공신전이 몰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태종 2년(1402) 2월에는 공신전이 31,240결로 줄어들었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21,200여 결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후에 공신전이 새로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공신전은 공신이 정해질 때마다 계속 지급되었다. 태종 11년의 원종공신전 1,680결, 단종 1년(1453)의 靖難功臣田 1,720결, 세조 1년(1456)의 佐翼功臣田 4,190결, 세조 13년의 敵愾功臣田 4,580결 등의 공신전이 그것이었다.173) 그러나 세종 22년(1440) 3월 이후에 지급된 공신전은 자손에게 세전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별사전은 사신·토목공사·守陵 등 국가에 공로가 있거나 親試에 급제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지급되는 토지로서 세종 22년 경에는 그 총액이 약 3,000여 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공로로 지급되는 별사전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이러한 반대 때문에 별사전은 가끔 환수되기도 하였다. 한편, 별사전은 수전이 금지되어 있는 천인들에게까지 지급되어 말썽을 빚기도 하였다. 태종 3년 경에 이러한 천인 수전자들이 17인에 이르렀고 이들이 받은 별사전의 총액은 690여 결이나 되었다고 한다.
별사전에는 토지의 소유권 자체를 주는 賜牌別賜田과 수조권만을 주는 無賜牌別賜田이 있었는데 전자는 세전이 허락되었으나 후자는 세전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공신전과 별사전은 전액 환수가 주장되는 가운데서도 세전만 금지되었을 뿐 계속적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그려나 이들 공신·별사전이 국가수입에 압박을 주기 때문에 때때로 전조의 일부, 또는 전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직전법이 실시된 후에는 이들 공신·별사전의 전조도 국가에서 관수관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신·별사전은 과전처럼 없앨 수는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