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원단 기우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圓壇을 언제부터 만들어 놓고 가뭄 같은 위기에 하늘에 비는 방식을 사용했던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고려 성종 때까지는 圓丘 제천 방식이 확립되어 사용되어 왔다. 조선초의 원단 또는 원구 기우제는 이런 전통의 계승이었다. 조선초에는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임금이 하늘에 직접 호소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여론이 자주 나왔지만, 태종 때까지는 대체로 그대로 지속되었다. 태종은 禮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잠깐 그만 두었던 원단 기우를 동왕 16년(1416)에 가뭄이 아주 심해지자 다시 실시하였다. 주로 당시 예문제학 卞季良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즉 변계량에 의하면 조선은 중국 천자의 책봉을 받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 이래 직접 천명을 받아 오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 때의 원단 기우는 당장 효과가 있어서 기우제를 지낸 결과 큰 비가 내렸다.004)
세종대에도 초기에는 여전히 원단 기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세종 9년(1427)을 마지막으로 원단 기우 방식은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강력한 원단 기우 주장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당대의 학자 변계량이 세종 12년에 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종은 21년, 25년, 26년, 31년에 계속해서 원단 기우제의 건의를 거부했다. 특히 이들 건의에는 당대의 대표적 고관이었던 金宗瑞·黃喜 등이 나섰고, 예조가 직접 나서서 건의했던 것을 세종이 거부한 경우도 있다.005) 세종이 독자적 학문성숙과 함께 이런 문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시행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원단 기우는 대체로 세종 이후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