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불교식 기우
원단 기우제가 중국에 대한 관계에서 세종에 의해 거부된 경우라면, 불교식 기우는 고려 때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행이 역시 조선초의 배불 경향과 함께 쇠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초에는 고려 이후의 관행에 따라 서울 시내에 있던 興天寺·圓覺寺 등에 많은 승려들을 모아 놓고 경을 읽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미 단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불교식 기우에 대한 반대는 성종 때에 더욱 심해졌다. 성종 13년(1482)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내려 임금이 기우제에 참가했던 승려들에게 상을 내리려 하자 홍문관 등이 반대의 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기우가 끝나고 비가 내린 것은 임금의 정성에 대한 반응이었지 승려들의 덕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종 16년에는 흥천사와 원각사에서 지내려던 기우제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불교식 기우제는 그 후에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궁지로 몰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당시 그대로 사실이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역사를 기술한 사관들의 경우 불교를 배척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종교성에 기울어진 수가 많았고, 특히 왕실은 내부적으로 불교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006)
006) | 朴星來, 위의 글, 142∼14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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