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향약의 장려와 감별
조선왕조는 건국초부터 향약의 채집과 이용에 힘써 왔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세종 14년(1432)에 “濟生院 提調의 요청에 따라 각 도·주·군에서 나는 약재들을 제생원이 원래 정한 貢案의 수매대로 채취 납입케 할 것,”139) 세종 17년에 “함길도의 경성 이북의 주·군들에서 나는 향약을 시기 적절하게 채취하기 위하여 함길도 본영에 醫學敎諭 1명을 파견할 것,”140) 세종 21년에 “산야에 향약의 씨를 뿌려서 계절에 따라서 채취하도록 하며, 약재의 種養, 채취의 많고 적음, 약을 감독하는 자의 부지런함과 게으름 등을 憲司가 매월초에 점검케 할 것,”141) 세종 30년에 “모든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향약 채취의 때를 잃지 않도록 하고 약재를 말리는 표준을 정하고, 중앙으로 약재를 공납할 때 채취인의 관명·인명과 날짜를 적어서 채취관들의 책임을 명백히 할 것”142) 등이 보인다. 이로 보아 향약 권장책이 중앙으로부터 왕명 또는 법규로써 각 도·군에 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 쓰는 의서는 대부분이 중국 의서였기 때문에 향약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우선 향약과 당약 사이의 약효를 비교·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비교·검토된 향약 중에서 당약과 약성이 일치되는 것은 곧 향약으로 대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당약을 똑같은 효과가 있는 향약으로 대치하기 위해서는 향약의 약성에 대한 올바른 감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따라서 세종은 藥理에 정통한 의인들을 중국에 파견하여 약물에 대한 지식을 넓히게 하였다. 그 예를 살펴보면, 세종 3년에 약리에 정통한 黃子厚를 副使로 명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당약을 널리 구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 5년에는 金乙亥·盧仲禮·朴堧 등을 명에 보내어 우리 나라산 약재에 대한 의문을 거듭 논의해서 향약 62종 중에서 중국산과 같지 않은 丹蔘 등 14종을 당약과 비교·검토하였다. 그 결과 서로 약성이 일치하지 않는 6종을 발견하였으며, 厚朴 등 8종은 중국산과 완전히 다른 향약으로 그 이후부터는 사용을 금지하였다.
또한 같은 해 典醫監·惠民局·濟生院 등의 요청에 의해서 명에 가는 사절이 있을 때마다 이들 기관이 자체적으로 상시로 당약을 무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입된 당재는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부족한 약재들을 보충하는 한편 향약을 감별하는 데에도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세종 11년(1429)부터는 전의감 등의 공식 의료기구뿐만 아니라 生藥鋪에서 파는 당약에 대해서도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의 예와 마찬가지로 생약포의 관인이 직접 명에 가서 매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향약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은 줄곧 계속되었다. 세종 12년에 盧仲禮가 또 다시 명에 가서 명의 禮部에 요청하여 우리 나라산 약재의 진위 여부를 중국의 太醫院 의사 周永中·高文中에게 확인토록 하여, 赤石脂를 비롯한 약재 10종은 맞는 것으로 판명하였고, 枳殼 등 10종에 대해 약 이름은 중국 것과 같지만 형태가 서로 다른 것으로 판명하였다. 이같은 확인 노력은 세종 13년 조선에 온 명의 太醫 張本立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
생약은 산지에 따라서 서로 같은 종이면서도 이름을 달리하기도 하고, 또는 거꾸로 그 이름은 같으나 품종이 다르기도 하다. 또 때에 따라서는 똑같지 않은 약재를 서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그 예를 들면 滛羊藿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경상도산, 전라도산이 아주 다르며, 當歸는 우리 나라산이 중국이나 일본산과 형태는 거의 비슷하지만 식물학적으로는 다른 종류이다.
따라서 향약을 권장·감별하기 위해서는 향약과 당재들을 꼼꼼히 비교·검토해서 약재들의 형태·분류·약성의 같고 다름 등을 상세하게 검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재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를 국외에 파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