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향약의 융성과 쇠퇴
가) 향약의 융성
조선시대에는 건국초부터 왕들이 모두 향약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는 중국약재의 수입에 따른 국비유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향약의 흥용은 중요한 국책 중의 하나였다. 특히 세종은 더욱 각별한 열정을 보였는데, 이같은 관심은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태조 말년에≪향약제생집성방≫이, 세종 15년에는≪향약집성방≫이 편찬되어 향약에 따른 치료법과 의학교육이 마련되었다. 또한 향약의 채취와 재배법이 정립되어 향약이용의 구체적 조치가 시행되었다. 역대의 왕들 모두 이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종 때에 들어와서는 그 문제가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져서 각종의 향약정책이 강구되었다. 성종은 채취된 향약을 정해진 기간에 관아로 들이도록 하여 품질의 향상을 꾀하는 한편, 그것을 다시≪향약채취월령≫에 따라서 각 도의 審藥에게 검사토록 하고, 최종적으로 內醫院이 향약의 지도를 맡도록 하였다.
또한 성종 때에는 향약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기관이 다시 부활되었다. 조선 건국초인 태조·태종·세종 때까지는 濟生院에서 각 관리에게 향약재를 나누어 주는 업무를 전문적으로 맡았지만 세조 6년(1460)에 제생원이 폐지되면서 향약을 취급하는 기관이 없어졌다. 그래서 성종 9년(1478)에 惠民署를 개칭하여 濟生署라 하고 그 곳에서 향약을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업무를 맡게 하였다.
성종 9년에는≪향약집성방≫을 다시 찍어 내면서 의원의 取材와 각 지방 관아의 의생교육에 채용하도록 하였다.≪향약집성방≫의 중간과 더불어 이 시기에 鄕藥本草 내용의 증가가 있었는데, 이 두 사항은 우리 나라 의학사상 특필할 만한 것이다. 또한 성종 10년에는 향약에 따른 구급방인 향약의방을 찬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성종 19년에는≪諺解簡易鄕藥本草≫가 편찬되었다.
향약의 장려책과 아울러 성종 9년에는 중국에서 무역해 온 약재 중 불량한 것을 골라내는 조처를 취하는 한편, 값비싼 약재의 무역을 제한하였다.
나) 명 의학의 발전과 향약연구의 쇠퇴
조선은 건국초부터 명과 의인·의서·약재들을 계속 교류해 왔으나 국교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 않았으므로 국내에서 명 의학의 발전은 뚜렷한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고려말부터 계속된 향약의 장려정책이 우선시 되었다.
그런데 세종 이후부터 명과의 사절 왕래가 잦아짐에 따라 사절을 수행하는 의인들의 왕래와 의학의 교류 역시 활발해졌다. 따라서 성종과 중종 때에는 명 의학자들이 저술한 의학서적들이 많이 수입되고, 우리 나라에서 직접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중종 때쯤 되면 명 의학이 거의 국내 의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같은 상황은 중종 13년(1518)에 參贊官 金淨이 당시 국내 의술의 황폐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의학서적을 찍어내는 것이 많지 않고 오직 중국에서 수입해 온 것만을 겨우 볼 수 있을 뿐”143)이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명 의학의 직접적인 영향은 역시 중종 때 씌어진 金緣의<謝遣醫官敎習表>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명으로부터 직접 의관을 초청하여 그들로부터 의학에 관한 지도를 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선조 때 나온 楊禮壽의≪醫林撮要≫에도≪中朝質問方≫·≪中朝傳習方≫등이 자주 인용되어 있다. 이것들은 명나라에 가는 사절들을 수행한 의관들이 명의 의원들과 서로 질의응답하여 얻은 의학적 처방을 적은 것이거나, 또는 명의 의관들이 내방하여 전습한 것을 적어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명의 의학은 두 나라 의관들의 질문, 전습, 또는 명의 의서들의 간행 등으로 인하여 성종·중종 이후부터 국내에서 더욱 발전을 보게 되었다. 선조 이후에는 명 의서들의 국내간본들이 醫科와 醫學取材의 講書로 널리 사용되었다.
국내에서 명 의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됨과 함께 우리 고유의학인 향약의 연구는 성종 이후 점점 쇠퇴하였다. 향약에 따른 의학서적들은 실제로 많이 이용되지 않았으며, 향약의 채취 또한 등한하게 되었다. 중종 34년의 기록을 보면, 향약을 채취하는 법이 해이하여 의약의 폐가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144) 따라서 사헌부의 청에 따라 內醫院·典醫監 등의 기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각 지방 관아에 칙령을 내려 약재들을 시기에 맞게 채취하고 잘 말려 중앙으로 올리도록 하였다.
약의 채취와 관리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약전마저 황폐화 되었다. 중종 39년에 “약전을 두는 것은 본래 약을 심어서 구급에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요즈음 약전이 황폐되어 약보다는 오히려 잡초가 번성하니 그 죄가 심하다. 약의 관리를 맡은 관리들을 의금부에 잡아들이고 醫司의 提調들을 잡아 들여라”145)라고 한 데서 그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중엽 이후 향약이 쇠퇴하였음은 인조 11년(1633)에 다시 찍어낸≪향약집성방≫의 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발문에서 崔鳴吉은 국내의 향약이 황폐화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어≪향약집성방≫을 다시 찍어내기 위한 定本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이 시기 향약연구의 쇠퇴는 성종 이후부터 명 의학이 융성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 의학의 융성은 중국과 의학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지만, 이는 당시 사림의 대두와 주자학 수용과도 관련이 깊다. 당시 수입된 명 의학은 주자학의 영향이 짙은 의학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주자학의 영향이 두드러진 李杲와 朱震亨의 의학이 크게 숭상되었다. 이와 성격이 다른 의학체계는 국내에서 등한시되었다.
당시 수입된 명 의학 중에서 특별히 우리 나라 의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명 후기에 나온 虞博의≪醫學正傳≫, 龔廷賢의≪萬病回春≫, 李梴의≪醫學入門≫ 등이었다.≪의학정전≫과≪의학입문≫은 공식적으로 의과와 의학 취재의 講書로 채택되어 법전에 명시될 정도였으며, 중앙과 지방을 통하여 여러 차례 찍혀 나올 정도로 당시의 의인들 사이에서 애독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의학서적들은 우리 나라의≪동의보감≫과 함께 의학적 파류를 형성할 정도였다. 寶鑑派·正傳派·回春派·入門派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