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불교적 의료
불교에 수반된 승려의학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불교적 의료는 민간뿐만 아니라 양반 사대부, 왕가에까지 널리 시행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배불숭유정책이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의학은 전 시대만큼 맹위를 떨치지는 못했지만, 불교 의료의 전통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특히 일반 민중들 사이에는 불법에 의한 치병의 전통이 굳건히 남아 있었다.
불교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전염병의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하여 水陸齋를 베푸는 것이 가장 널리 행해졌다. 당시 전염병은 억울하게 죽은 혼들이 뭉쳐 생긴다는 민간에서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수륙재는 억울하게 죽은 자의 넋을 달래주는 의식으로 널리 베풀어졌다. 수륙재와 함께 때에 따라서는 사원과 궁안에서 藥師精勤·觀音精勤·救命精勤·救病精勤·消災精勤 등을 베풀어 질역을 퇴치하고자 했다.
왕실에서 불교의료를 베풀었다는 기록은 조선 전기를 통틀어 자주 보인다. 태종 8년(1408)에 태상왕의 병환이 중하자 승도 백 명을 모아서 약사정근을 행하는 한편, 藥師像을 바치면서 德方寺에서 수륙재를 베푼 적이 있다. 또한 같은 해 중전의 병이 위독하자 약사정근을 본궁에 설치·기도하였다. 세종 3년(1421)에는 讓寧大君이 학질에 걸리자 어의가 아닌 승려들을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都城의 동서에 구료소 4곳을 설치하여, 惠民局 提調 韓尙德에게 의원 60명이 대사 坦宣이 거느린 승도 3백 명과함께 군인들의 질병과 부상을 공동으로 구료하게 하였다. 또한 같은 해 僧伽寺에서 약사정근을, 문경사에서는 관음정근을, 津寬寺에서는 수륙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때에는 이 밖에도 불교식 구명정근을 설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또한 한증소의 관리와 운영을 한증승이라는 승려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 후 문종 원년(1451)부터 성종 20년(1489)에 이르는 동안 황해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때마다 도교적인 厲祭와 함께 불법에 따른 수륙재를 같이 베풀었다. 이같은 방법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