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화포보급의 확대
세종 4년(1422) 8월 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가 아뢴 것에 따라 왜구를 막기 위해 전국 해안에 烟臺를 증축하고, 그 위에는 화포를 비치하게 하였다.377)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水鐵火㷁碗口 및 信砲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화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간다는 면에서 확실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화기가 서북변경에서 여진방어에 이용된 사실이다. 이미 태종 17년(1417) 10월 화약과 화통이 경원에 보내졌고, 세종 4년 12월에는 閭延赴防軍에게 銃筒을 익히게 하였다.378) 또 세종 8년 7월에는 成才別軍 1명을 보내어 경원·鍾城 등지의 官奴 중 영리한 사람에게 소화포를 가르치도록 하였다.379) 아울러 세종 10년 이후 신포와 발화가 이 지역에서 다량으로 이용되었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다. 당시 여진은 片箭과 화포를 가장 두려워하였으므로, 세종은 14년 2월 연대·신포·소화포 등을 미리 갖추록 지시하였다.380) 서북변경에 화포를 더 보내는 것과 放用術의 보급은 세종의 北進策이 적극화함에 따라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시기의 특징을 이룰 만큼 성해져 갔던 것이다.
이 밖에도 화포는 용도가 확대되어 요동지방의 虎狼을 방어하기 위해 사신이 왕래할 때 호송용으로 쓰이기 시작하였고, 명사가 요구하는 품목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明器類로까지 사용하게 되어, 세종 2년 7월의 大行厚德王大妃 齋物品目에서도 화통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