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령권 강화와 사족의 향권 상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 중기의 향권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향촌사회 지배기구의 직임, 특히 유향소(향소)의 임원(향임)이 가지는 권한을 의미하고 있었는데, 이 때 향권의 주된 내용은 吏民에 대한 통제권과 부세운영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좁은 의미의 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향권은 향임이 가졌던 권한 및 향임에 대한 인사권을 포함하는 재지사족의 일향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향공론, 즉 향론 주도권이 그것이다.
조선 중기의 재지사족은 향안과 향회를 기반으로 하여 향권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관권(수령권)과의 타협을 전제로 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아래로는 吏民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향촌사회에서 관권이 갖는 의미는 제한적이었다. 이 시기 재지사족은 특권신분층으로서 자신들의 신분적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지배기구를 향촌사회내에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를 매개로 하여 수령권이 관철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구조는 결코 완결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회가 변동하면서 끊임없이 보완이 요구되었고, 특히 향촌사회에서 사회모순을 야기하는 주체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재지사족은 지속적인 자기비판과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향약이나 향규가 관권과의 마찰을 극도로 자제하고 이민의 통제와 아울러 자신들의 통제를 중요한 문제로 강조하였던 것도 바로 그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족의 향권과 수령권과의 모순은 사족의 향권이 안정적일 때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사족의 향촌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약화되고, 그들이 향임 등 향촌 지배기구의 직임을 맡는 층들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제 수령은 사족들만을 향촌지배의 동반자로 삼을 수는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경제력이나 신분상의 분화에 따른 사족들 자체의 분열, 즉 향론의 분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수령의 견제와 吏鄕層들의 도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이향층은 물론 부민층들이 새롭게 향권에 접근하고 있었는바, 수령은 바로 이들을 향촌지배에 새롭게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수령이 향촌사회를 통치하는 데 있어 사족만을 동반자로 삼았던 것은 아니고, 사족들과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만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족들이 향촌 지배기구를 이용하여 이민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족들의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데, 이제 그같은 조건에 변화가 나타나면서부터 수령은 새로운 동반자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사족의 분열만이 아니라 왕권강화에 따른 정부의 수령권 강화책, 그리고 정부의 ‘抑强扶弱’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기존 재지사족의 향권은 부정되고 향권의 의미도 향촌지배기구의 직임이 갖는 권한이란 좁은 뜻으로 축소되게 되었다.
수령권 강화책으로 표현되는 정부의 관주도의 향촌통제책은 물론 그 이전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것이지만, 이 시기의 그것은 부세운영에 있어 사족의 간여를 배제하고 그 운영을 수령이 직접 자신의 관리 아래에 두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같은 점은 18세기 사족이 주도하여 실시하고자 했던 향약에서 부세운영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남원인 崔是翁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시옹은 숙종 38년(1712) 남원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조대 실시하였던 ‘鄕約之規’가 해이해진 뒤 향청과 질청(作廳)이 모두 향약의 이름을 꺼려 없애려 하고, 사대부 또한 그 중독을 피해 시비에 끼어들지 않으려 하므로 향소와 서리가 ‘聯名作契’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奉公일절은 향약 중 하나의 일인데, 환곡 부역의 포흠 적체가 과연 士夫와 良民에게만 책임이 있습니까. 향풍이 어그러진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위 두 문제는 향약중의 大節로서 一番人이 심히 꺼려하는 바입니다. 그간에 혹 사사로움에 끌린 바 없지 않았겠지만, 어찌 남의 말을 전혀 생각치 않고 오로지 사사로운 뜻만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복고(향약시행)의 뜻을 가지고도 마저 이 두 가지(환곡, 부역)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이는 목구멍을 막고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고 가라고 하면서 다리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崔是翁,≪東岡遺稿≫권 2, 與李地主聖漢).
위 편지 내용은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질서가 향임층과 이서들에 의해 부정되면서 관에서 인정하는 향약 역시 환곡이나 부역의 문제를 배제한 것이어서는 향약 본연의 의미가 살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들어와 이미 부세운영권의 문제는 사족의 손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회가 사족들의 자치기관에서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한 현상이었다.
이같은 변화는 정부의 향촌통제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숙종대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 온 관 주도의 향촌통제책은 일단 숙종 37년(1711)<里定法>으로 제도적 정비를 보게 되는데, 이 이정법체제는 사족의 부세운영 참여를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 37년 12월<양역변통절목>의 반포와 함께 하달된 이정법체제는 흔히 교화로 표현되는 부문에서는 士夫(사족양반)를 끌어들여 책임을 맡기면서도, 기타 행정적인 차원에서의 부세문제 등은 중간담당층에게 맡기고 있었는바, 이와 같은 정책이 갖는 의미가 바로 수령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려 했던 향약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한편 위의 이정법은 숙종 39년 비변사 八道句管堂上 有司堂上制로 보완된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제도는 비변사에서 당상관으로 하여금 각 도에서 올라오는 공문 및 각종의 공사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각 도를 맡는 구관당상을 두고 유사당상 4인으로 하여금 팔도의 구관당상을 돕는 차원에서 각각 2도 씩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이 후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임지에 부임하기 전 본도 구관당상을 더 찾아보아야 하게 되었다. 구관당상제를 둔 것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아진 지방관들을 비변사에서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시기 향촌사회의 문제가 중앙에서도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위와 같은 제도들은 아직까지 사족의 특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사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왔던 향권을 관의 통제 하에 복속시키려 하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정책의 배경이 된 것은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이 위축되고, 사족 내부의 분열에 따른 향론의 불일치로 기존 사족의 향권이 원만히 행사되기 어려워지고 있었던 사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당시 경제적 변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양역변통절목에서 수령의 권농기능이 특히 강조되었던 것은 그같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는 숙종 21, 22년의 대기근과 계속되는 전염병 등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부민층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부는 사태수습을 위해 주전이나 부민납속책을 적극 추진하면서도 수령들에게 권농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향촌사회 운영에서 부민층이 주목되기 시작한 점도 당시의 경제적 변동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현종 원년(1660)의<募穀別單>에 보이는바, 납속정책이 양천민을 배제한 것이 아니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사족을 기준으로 해서 작성되었던데 반해,0183) 이 후 부민층이 납속책의 기본 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국가의 향촌운영에서 동반자로 삼았던 층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점은 영조 8년(1732)의<勸分富民施賞節目>에서 납속의 주체를 부민으로 명시하고 시상의 내용도 보다 구체화시킨 데서 확인된다. 영조는 관료들의 비판, 즉 납속책(私賑)이 관료기구(名器)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고 보는 견해에 반대하고, 오히려 賣爵보다는 賣義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즉 납속에 응모한 부민들에게 품계나 관직을 준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0184)
그런데 위와 같은 관주도의 향촌정책이 일시에 사족의 향권상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영조 14년 경상감사 尹陽來가 안동의 金尙憲書院 건립시비와 관련하여 ‘안동의 향권은 국가가 억탈하려 해도 또한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것0185)은 국가가 지방세력을 국가의 완전한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는 점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직도 재지사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남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숙종 38년 이정법을 이용하여 재지사족이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특히 안동같은 경우는 19세기까지도 재지사족이 향청(향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추진된 관주도의 향촌통제책과 지방세력에 대한 억압정책은 향촌사회의 권력구조를 크게 변화시켜 나갔다. 이제 안동 등 특수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사족이 향촌사회의 권력구조 안에서 그 이전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光州에서의 영조 23년(1747) 향안파치 및 영조 42년 향집강안(좌목판) 파쇄사건은 재지사족의 향권상실에 관한 사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0186) 이 사건은 영조 42년 당시 전라감사가 광주의 향안과 집강안을 봉인해서 올리라는 지시를 하고, 광주목사가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다. 당시 감사는 광주 사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향집강들이 향권을 천단하고 校中會·書院會·邑中會 등 향회를 빙자하여 민간에 작폐한다는 말을 듣고 그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위 감사의 지시에 따라 수령이 조사 보고한 기록에서 밝혀진 관련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에는 영조 42년까지 숙종 중엽에 만들어진 향안이 전해오고 있었는데, 이 후 영조 23년 새로운 향안이 만들어졌으나 이 新案은 사족 내부의 분열에 의해 혁파되었다. 둘째, 위 향안파치사건 이후에도 광주에서는 鄕執綱 18인, 즉 鄕老 6원·鄕長 6원·鄕有司 6원 등이 중심이 되어 향론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향청 벽에 좌목판(향집강안)을 만들어 걸어놓고 鄕儒 중 나이든 사람 가운데 18인을 선출하여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셋째, 영조 42년에 이 좌목판마저 감사의 지시에 의해 파쇄되었다.
17세기 호남의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체제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던 광주에서 향안이 혁파되고, 향론을 주도하던 향집강들의 명단을 올렸던 좌목판마저 감사의 지시에 의해 잘게 부서졌다는 사실은 기존의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 사족의 향권이 관권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광주목사가 보고하는 가운데 자신이 부임한 이래 향회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내용과 관련지워 본다면, 위의 교중회·서원회·읍중회 등으로 불리는 모임을 통해 사족들은 향권에 간여하고 있었다고 할 터인데, 이 역시 기존의 향회를 통한 사족들의 향촌사회 운영방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호남의 경우 향회가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수령의 통제하에 놓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음 湖南釐正使 李成中의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균역법 실시 직후 영조 30년 호남에 내려가 조사활동을 마치고 올라온 이성중의 보고서 내용을 보자.
結戶役을 이정한 후에도 향회를 통한 가렴의 폐는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외방의 결호역의 증가는 매번 향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른바 향회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一鄕 士民의 공론에 따른 것이 아니고, 좌수 별감이라는 자들이 수령의 턱 아래에서 놀면서 그들의 형이나 아우를 시켜서 통문을 돌리고 불러모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향회에서는 혹 관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또는 민역을 마감해야 한다는 명목을 들어 제멋대로 가렴하고 손이 가는대로 법을 만드니 일의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향품 또한 민으로서 민간에 대한 가렴의 폐가 결국 자신에게 미칠터인데 어찌 스스로 자신에게 가렴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할 지 모르지만, 이는 향곡의 물정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 이 후 만일 향회를 칭하여 민역을 걷어내는 경우, 호에서 걷든 결에서 걷든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수창인은 형으로 다스려 멀리 귀양보내고, 그것을 덮어주고 보고하지 않는 수령은 비중에 따라 죄를 물음이 마땅할 것입니다(李成中,≪質菴遺稿≫권 1, 湖南釐正使書啓, 영조 30년 4월 28일).
위 보고서는 18세기 중엽의 향회가 좌수·별감 등 향품의 주도로 열리고 있지만 사족들의 공론을 집약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수령의 턱 밑에서 수령에 의해 좌우되는 부세자문기구적인 것이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호서의 경우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호서 예산의 경우를 한 예로 살펴보자. 18세기 초 현감으로 부임한 金幹은 상하인민에게 경고하는 가운데, “향촌에 거주하면서 혹 당론을 주장하고 관부에 들어와 혹 사사로운 부탁을 하며, 향곡을 무단하며 양민에게 해를 끼치거나, 형세를 빙자하여 관령을 멸시하는 것, 이 모두는 士夫의 미행이 아니다. 일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0187) 라고 하면서 사부들의 분열과 그들의 양민침탈 및 관부와의 마찰 등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수령들의 사족견제, 즉 抑强扶弱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김간보다 50년 뒤에 같은 예산에 부임한 韓警은 오히려 수령의 억강부약정책으로 인한 폐단을 문제삼는 감사의 지적에 접하게 된다. 한경이 예산 사부들에게 전달한 감영으로부터 내려온 관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근래 감사들이 필칭 호서의 사부들이 호강하다는 점을 들어 매번 抑强扶弱을 위주로 임금께 보고를 하는데, 이는 호서 사부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또한 사부들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이 고장 사람으로 우리 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억강지정 때문에 폐단이 일어나고 명분과 풍속이 날로 어그러져 왔다. 양반이 양민을 침학하고 强品(호강품관)이 향곡을 무단하는 일이 과거에 왕왕 있어 왔지만, 이른바 억강지정이라는 것이 그것을 없애지는 못하고 오히려 상한천류로 하여금 사납고 간교한 기운을 더하게 하여, 부를 믿고 가난한 양반을 욕보이는 자들이 생겨나고 돈을 쥐고 명분을 어지러이 범하는 자들이 나타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관장(수령)은 매번 양반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억강으로 일관하니, 사부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펴지 못하고 교활한 부민이 방자하게 거리낌없이 행동하게 되었다(韓警,≪烏山文牒≫, 임오 정월 26일 傳令草, 영조 38, 1762).
위 감사의 관문은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감사의 ‘억강부약’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당시 감사 尹東暹은 이같은 점을 상기시키며 사족들의 협조를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한경은 이같은 감사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면서도, 아울러 사족의 근신을 다음과 같이 주문하고 있었다.
도내인 가운데 富民으로서 양반을 모욕하거나 豪鄕으로서 사족을 범하는 자는 모두 마땅히 다스려야 하니 적발되는 대로 엄히 다스리겠다. 그러나 士夫班品者 또한 營門(감영)의 위와 같은 지시를 곧바로 양반을 편호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거꾸로 호강지정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양반의 도리를 다하여 소민의 모범이 되면 頑民도 감히 범접치 못할 것이고 관장 또한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관사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韓警,≪烏山文牒≫, 임오 정월 26일 傳令草, 영조 38, 1762).
우리는 위와 같은 지적에서 억강부약정책이 지속되는 가운데 오히려 그같은 정책의 결과 돈 많은 부민이나 호강한 향품에 의해 양반이 능욕을 당하는 역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호서지방에서도 사족들의 지위가 부민, 호향들에 의해 크게 위협받게 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간에 추진된 억강부약정책에 의해 사족들이 누려왔던 기존의 향권에서의 지위가 약화되어 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위와 같은 사정의 변화는 수령이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여 향촌사회를 통치하는데 문제가 야기됨에 따라 수령권에 의해 향권이 부정되어 갔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수령권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의 향권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이 과정에서 향권을 둘러싼 기존 세력과 신세력간의 마찰인 鄕戰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는 사족 중심의 자치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정이 지속되면서 이제 수령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고 지방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되었다. 전에는 관리들이 일반적으로 내직을 선호했었는데, 이제 누구나 앞을 다투어 지방관을 선호하게 되어 ‘一邑作缺 爭者如雲’0188)하는 상황이 문제로 되었다. 이전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0183) | 현종 원년의<모곡별단>이 기본적으로 사족을 대상으로 해서 작성된 것임은, 加設職 제수 조항에서 “謝恩奉贈은 正官例에 따라 사족에게만 허락하며, 천인 및 양인으로서 마땅히 군역을 져야 하는 자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 첨지 이상은 사족 양민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허락하되, 양민의 경우에는 사족에 비해 10석을 더 납부하도록 한다”고 규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備邊司謄錄≫20책, 현종 원년 12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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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4) | ≪英祖實錄≫권 1, 영조 즉위년 10월 임진. |
0185) | 鄭萬祚,<英祖14年의 安東 金尙憲서원 建立是非>(≪韓國學硏究≫1, 同德女大, 1982), 60쪽. |
0186) | 광주 향안파치사건과 향집강안 파쇄사건에 관해서는≪報牒考≫(奎古. 5125-68)의 기록에 의거한다. 김인걸의 앞의 글, 참조. |
0187) | 金 幹,≪厚齋先生集≫割鷄錄, 通諭境內上下約條(숙종 27년, 1701). |
0188) | ≪承政院日記≫ 578책, 영조 즉위년 11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