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곡학파
율곡의 고제자인 사계 김장생은 龜峰 宋翼弼의 문인으로 구봉에게서 예학을 전수받았으나 성리학은 율곡에게서 배워 율곡의 학문을 이었다. 그는 “퇴계선생의 사단칠정호발설은 陽村 權近의 入學圖說에서 나왔다. 그 圖에 사단이 仁의 좌변에, 칠정이 인의 우변에 적혀 있는데 정추만은 양촌에 입각하여 도를 만들었고 퇴계는 추만에 근거하여 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호발설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0542)고 하여 퇴계의 이기호발설이 권양촌의 입학도설과 정추만의 천명도설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하고 이어서 퇴계의 호발설이 주자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사계는 퇴계의 호발설과 더불어 格物에 대한 퇴계의 “물리의 극처가 나의 궁구함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理自到說을 반대하여 퇴계학파의 愚伏 鄭經世와 논변을 벌이기도 했다. 사계는 여기서 格物而物格을 “손님을 불러서 손이 온것과 같다”고 설명한 우복의 비유에 대해 이는 물리가 객손이 되어 내마음에 왕래하게 되고 知至의 한 단계가 간데 없게 되어 내마음과 상관이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0543) 사계까지만해도 퇴계의 학설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든지 의심스럽다든지 하여 상대방을 존중하고 논변에 당파적인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으나 우암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율곡과 사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율곡의 성리학을 주자학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만든 사람은 우암 송시열이다. 우암은 퇴계와 우복의 학설을 공격하고 율곡의 설이 옳음을 논증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에 예송문제로 격화된 당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암이 48세 때 柳稷 등이 율곡의 이기일물설은 주자에 어긋난 육상산의 道器論에 가깝고 율곡이 “주자가 참으로 이기호발이라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과오다”하여 전현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율곡의 문묘배향을 반대하자, 첫째 주자가 이기호발을 주장하지 않았고 둘째 율곡은 이기는 혼륜무간하다 했으니 일물로 본 것이 아니며 셋째 주자도 고승 도겸에게 배운 바 있으니 율곡의 출가도 용납될 수 있다고 율곡을 변호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우암은 평생에 걸쳐 율곡의 설과 주자의 성리설이 일치함을 논증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가 후일 南塘에 의해 완성된 저술≪朱子言論同異攷≫이다. 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퇴율의 설이 나누어진 이유를 밝힌다.
理氣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理로부터 말할 수도 있고 氣로부터 말할 수도 있다. 시원으로부터 말할 수도 있고 현상으로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개 이기는 혼륜무간하나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이므로 뒤섞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이에 동정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가 기를 주재한 것으로부터 말한 것이고 이에 동정이 없다고 한 것은 기가 운행하는 것으로부터 말한 것이다. 선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이기의 개념에서 한 말이요 무선후는 이기의 현상에서 한 말이다(宋時烈,≪宋子大全≫부록 권 19, 記述雜錄 韓元震).
우암의 이 말만 놓고 본다면 퇴계와 율곡은 각각 이기의 한 면을 말한 것으로 근본은 같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우암은 퇴계의 이기호발설이≪주자어류≫의 ‘七情是氣之發 四端是理之發’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지만 퇴계의 오류는 그 구절에 너무 집착하여 그와 모순되는 구절이 있음을 간과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주자의 이 말이 혹 기록자의 실수인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는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의 논리를 계속 밀고나가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므로 칠정과 마찬가지로 사단도 선악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퇴계·고봉·율곡·우계는 모두 사단을 순선하다고 여겼으나 주자는 사단에도 불선한 점이 있다고 여겼다. 알지 못하겠도다. 네 분 선생님들은 주자의 이 말을 보지 못했는가. 사단이 어떻게 불선할 수 있는가. 사단도 氣發而理乘하기 때문이다. 발할 때 그 기가 청명하면 이도 순선하지만 그 기가 혼탁하면 이도 그것에 가리워지게 된다(宋時烈,≪宋子大全≫권 130, 雜著 朱子言論同異攷).
우암의 율곡설 추종과 퇴계비판은 결국 주자학의 고수로 귀착되는데 우암의 이러한 순수 주자학에의 집착은 예송을 통한 정쟁중에 남인계열의 미수 허목과 백호 윤휴가 고례의 ‘왕가의 예는 일반인과 다르다’는 구절을 들고 나와 왕권을 옹호하면서 당시의 집권층이던 서인의 주자가례의 입장을 공격하자 더욱 견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학적 기풍을 지녔던 윤휴의 경전주석이 주자학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윤휴를 賊鑴, 斯文亂賊, 洪水나 猛獸보다 심하다고 극렬히 비난했고 더 나아가서는 윤휴와 교우를 단절하지 않는다고 하여 윤선거, 윤증에게 鑴黨, 從鑴라고 비난을 가하여 마침내 노론과 소론이 갈라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의 성리학은 실로 우암에 이르러 완전히 주자학 중심으로 고착되었으니 우암의 성리학은 이전의 성리학설을 화석화하고 이후의 성리학을 제약한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우암의 문인중 학술과 문장이 뛰어나 우암의 의발을 전수받을 것으로 기대되던 明齋 尹烝이 懷尼是非 이후 휴당으로 배척되었기 때문에 우암의 이러한 율곡 추종과 주자학 고수라는 과제는 遂菴 權尙夏에게 계승되었다.
수암은 ‘학문은 주자를 주로 하고 사업은 효종의 대의를 주로 하라’는 우암의 가르침대로<四七互發辨>을 지어 퇴계의 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사단칠정, 기발이승일도설이 주자의 의도와 합치됨을 변증하고 있다. 수암의 성리설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心의 의미를 둘로 나누어 人心道心說을 설명한 부분인데 수암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심은 形氣의 私에서 생기는 것이니 이 때의 기는 이목구비를 지칭한 것이다. 칠정은 기에서 발하는 것이니 이 때의 기는 심을 지칭한 것이다. 글자는 같아도 의미가 전혀 다른데 옛부터 선현들은 항상 人心道心은 이같이 설명이 가한데 사단칠정만이 이런 설명이 불가한가라고 말하니 깊이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權尙夏,≪寒水齋集≫권 21, 雜著 四七互發辨).
수암의 이 분석에 따르면 칠정이 곧 인심이 될 수 없으므로 사단과 도심은 곧 이의 발이고 칠정과 인심은 기의 발이라는 호발설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상에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계승한 사계, 우암, 수암이 어떻게 퇴계의 호발설을 비판하고 어떻게 율곡의 설이 주자의 본령에 일치함을 논증하는 지를 살펴 보았다. 우암에서 수암에 이르는 과정에서 율곡학파는 지나치게 율곡의 기발이승의 입장을 강조하고 논리적으로 확대해석한 결과 주자학 본래의 ‘理’ 강조를 도외시한 감이 있다. 여기서 퇴계학파가 율곡학파와 율곡의 성리설을 비판할 수 있는 소지가 생기게 되었고 또 후일 율곡학파 내부에서 호락논쟁이 싹트는 계기가 마련되어 조선성리학이 재정립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