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퇴계학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퇴계학파라고 해서 그냥 퇴계 일변도가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사상적 갈래를 치고 있지만 여기서는 율곡학파에 대립되는 학파로서의 퇴계학파가 지니는 사상적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서 율곡, 사계, 우암 등의 호발설 비판에 대한 퇴계학파 유학자들의 역비판과 퇴계설 옹호를 위주로 퇴계학파의 사상전개를 살피고자 한다.
율곡과 율곡학파 학자들의 퇴계비판은 주로 퇴계의 이기이물, 사단과 칠정의 분리, 사단과 칠정의 이기호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부분에 관련된 퇴계의 사상체계는 기묘사화로 붕괴된 성리학적 보편가치의 이론적 재정립이라는 당시 사림계 성리학자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四端, 性, 理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논리적인 무리가 있게 된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율곡학파의 퇴계비판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론을 펴기 시작한 학자는 서애의 문인인 우복 정경세였다. 우복은 사계가 퇴계의 호발설에 대해 “이기를 이물로 나눈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한데 대해, “이기는 본래 일물이 아니다. 다만 일찍이 서로 떠나지 않은 까닭에 混融無間이라 하였을 뿐이지 ‘무간’ 두 글자를 자세히 살피면 그것이 이물임은 분명하다. 율곡이 반드시 이기를 일물로 삼은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건대 아마 그대가 잘못 기억하였던 듯하다. 하물며 이와 기가 합하여 성을 이룬다는 것은 주자의 설인데 이 조항은 북계도 쉽게 공파하지 못했음에랴”0544)고 하여 주자에서 전거를 구하고 혼융무간을 분석하여 퇴계의 호발성을 옹호하였다. 또 고봉, 율곡의 七情包四端에 대해 “요사이 사람들이 喜·怒·哀·樂을 仁·義·禮·智에 분배하고자 한 것은 억지로 갖다붙인 설에 지나지 않는다. 칠정은 그대로 칠정이고 사단은 그대로 사단이어서 아마도 서로 합치할 수 없을 것이다. 맹자의 기뻐함과 문왕의 성냄이 어째서 理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0545)라고 하여 나름대로 칠정과 사단의 일치를 주장한 율곡학파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복은 율곡설을 따른 사계와 깊은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사계와의 논변(예설과 격물치지의 해석을 중심으로 성리설 전반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중에서 율곡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퇴계에 대한 승모에서 나온 것이지 당쟁과 결부된 것은 아니었다.
율곡의 성리학과 율곡학파의 퇴계비판에 대한 보다 격한 반응은 송시열 이후 율곡학파의 퇴계설 비판이 본격화되고 이것이 당쟁과 결부된 이후 즉 퇴계의 사후 약 백년이 지난 때부터 시작되는데 鶴峯의 학통을 잇고 있는 葛菴 李玄逸(1627∼1704)과 그의 벗 愚潭 丁時翰(1625∼1707)의 율곡설 비판이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갈암은 율곡의 “퇴계의 이기호발에 입각한 사단칠정론이 의리불명하고 고봉의 전설이 명백직최하다”0546)는 비판에 대해 ‘백세 후에도 의심할 수 없는’ 퇴계의 사단칠정에 관한 정론을 재천명하기 위하여<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하여 율곡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갈암은 율곡이 우계에게 보낸 서한에서 19개 항목을 발취하여 율곡의 사단칠정론과 機自爾說, 인심도심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우선 사단칠정론에 대해서 갈암은 다음과 같이 율곡을 비판하고 퇴계의 호발설을 옹호하고 있다.
율곡은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니 사단이 칠정이 아니고 칠정이 사단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했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사단과 칠정이 각각 하나의 설이 된다. 억지로 일설로 합해서는 안된다. 주자도 ‘七情是氣之發 四端是理之發’이라고 했다. 따라서 칠정을 사단에 분배하는 학설은 불가하다. 율곡은 이 점에서 깊이 생각하여 그 같고 다름을 유의하지 않고 갑자기 일도로 묶어 버렸다. 그의 학설은 한결같이 촉과 월처럼 먼 것을 억지로 지리하게 끌어 붙이는 병통이 있으니 애석하다(李玄逸,≪葛菴集≫권 18,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갈암의 율곡에 대한 비판은 주자의 理有動靜과 七情是氣之發 四端是理之發이라는 말에 근거하여 퇴계의 理自有動靜과 四端理發氣隨 七情氣發理乘이라는 이기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단칠정론의 이러한 논리를 계속 확대하여 율곡의 “음양동정은 기가 스스로 그러할 뿐 그렇게 되게 하는 자가 없다”고 하는 기자이설에 대해서는 “이가 무위하기는 하지만 조화의 중심 만물의 근저이다”고 전제하고, 주자의 “이에 동정이 있는 까닭에 기에 동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 율곡의 설이 주자의 설과 어긋남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율곡의 이기설, 사단칠정설, 인심도심설은 나정암의 설을 취한 것으로 주자의 본령과 어긋난 선학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하였다.0547)
갈암의 벗인 우담의 율곡설 비판도 이통기국설을 분석하여 그것이 理一分殊라는 주자학의 대전제와 모순됨을 말한 것0548) 이외에는 갈암의 위와 같은 비판과 대동소이하다. 갈암과 우담의 이러한 율곡비판은 당파에 얽매인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義와 利를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유가의 전통적 입장(따라서 義의 근원이 되는 사단과 利를 추구하는 형기의 칠정은 구분되어야 하고 그 형이상학적 근거인 이와 기도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가져야 한다)을 이론적으로 사수하려는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대부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갈암과 우담의 율곡설 비판 이후 퇴계의 이기호발, 이유동정설은 더욱 극단적으로 해석되어 大山 李象靖에 이르러서는 理는 無爲而爲 不宰而宰하여 理動氣生하는 活物로 보기까지 한다.0549) 결국 이발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퇴율 양학파의 입장 차이는 주자학적 명분의 고수, 즉 유교적 사회질서 자체의 위상에 관계된 것이지 논리적인 세계 해석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율곡학파에서도 理發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理가 보편적 존재이고 기에 우선하는 존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갈암·우담의 위와 같은 비판은 이러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닌 유교사회라는 범위 안에서 나름대로의 일정한 타당성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