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국문 보급과 국어 연구
1) 시대적 특성과 경향
현재까지 통설로 되어 있는 국어사의 시대구분이나 국어학사의 시대구분과는 달리 설정한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따른 조선 중기(대략 16, 17세기) 기간은 15세기 중엽에 창제된 훈민정음이라는 우리 고유문자로서의 국문 창제에 이은 그 보급 확대의 시기요, 음운학 연구의 전개와 심화의 시기요, 그리고 실학사상에 자극받은 새로운 국어연구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요, 새로운 어휘정리를 시도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어·국문에 대한 관심이 꽃핀 시대는 조선 후기이기 때문에 조선 중기는 대체로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교량적 역할을 한 시기로서의 특성과 경향을 보여준다.
국문인 훈민정음이 창제됨에 따라 국한문혼용체의 가사를 포함한 한문본≪龍飛御天歌≫와 역시 국문 및 국한문의 용례를 포함한 한문본≪訓民正音≫이란 해설서가 간행되고, 이어서≪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月印釋譜≫등의 불교 관계 책들이 국문 표기의 한자어에 한자를 하나하나 달던가 한자에 음을 국문으로 하나하나 달던가 하는 표기방식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대부분의 책은 한자어만 한자로 표기한 국한문혼용체이기는 하나 다만 한자어의 한자 하나하나에 국문으로 음을 달아주는 懸音國漢文混用體의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불교 계통 이외의 책들도≪內訓≫·≪三綱行實圖≫등과 같이 마찬가지로 현음국한문혼용체로 간행되었다. 흔히 언해본에서 이루어진 조선 초기의 이러한 표기방식은 조선 중기를 거쳐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져 온 가장 대표적인 표기방식이 되었던 것이다.0707)
한편≪용비언천가≫의 국한문가사와 같이 번역문이 순수한 국한문혼용체로 된≪杜詩諺解≫도 있고 원간의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百聯抄解≫와 같이 한시의 매 한자에 일일이 釋과 音을 달고서 순수한 국문 전용을 한 경우도 있었다. 때로 국문으로 토(또는 口訣)를 달기만 한≪圓覺經口訣≫·≪周易傳義口訣≫등과 같은 책도 간행되었다. 그런가 하면≪衿陽雜錄≫의 穀品에서와 같이 곡물명을 이두와 국문 두 표기로 한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공사문서는 여전히 이두를 썼다.
요컨대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로 한문, 국한문 및 국문의 이들 세 표기방식이 글의 성격에 따라 선별적으로 쓰였던 것인데, 조선 중기 또한 그러하다.
훈민정음이란 문자체계를 좀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보급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미≪월인석보≫첫째 권의 첫머리에≪훈민정음≫의<예의>부분을 국역하여 실은 바 있었는데, 이는 훈민정음이란 문자체계를 보인 부분으로 현음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는≪월인석보≫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 국문의 해득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자의 뜻과 음을 국문으로 달도록 한 한자학습서≪訓蒙字會≫의 범례에 붙여<諺文字母>를 실었는데, 이도 역시 같은 의도에서였다. 이런 문자 보급의 적극적인 방법은 조선 중기 이후의 한 경향이었던 것이다.
한편 훈민정음이란 우리 문자의 창제이론인 성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다시금 싹트게 된다. 조선 중기에 그 관심의 시초가 되는 예는 徐敬德의<聲音解>등이라 할 수 있는데, 17세기 후기에 崔錫鼎의≪經世正韻≫(1678)으로 이어지고 조선 후기에 그 꽃을 피게 된다.
다음으로 어휘수집 작업이 행해진 점도 조선 중기의 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문으로 된 문헌을 해득하기 위하여 한문 어귀나 어휘를 우리말로 풀이한다든가 한문으로 주석을 달든가 한 어휘집의 간행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의 새로운 대외정책에 맞추어 漢·淸·蒙·倭語의 학습을 위한 대역사전들의 간행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도 역시 조선 후기에 이어지면서 확산된다.
끝으로 조선 중기에 싹튼 실학적 연구의 한 경향이 있다. 상당히 고증적인 방법으로 문자(한자) 어휘 속담 등의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려 한 李睟光의≪芝峰類說≫에 보인<文字部>와<語言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고증적인 방법은 자연히 어원해석을 때로는 포함하게 된다.
요컨대 조선 중기에 있어서 어문과 관련된 경향은 첫째 15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훈민정음 창제에 따른 계속적인 보급, 둘째 훈민정음 창제이론과 관련된 음운학적 연구의 전개, 셋째 어휘집의 간행, 넷째 고증적 방법에 의한 언어 정리 등이다. 말하자면 조선 전기의 계승과 조선 후기의 준비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던 시기가 곧 국어연구에서 본 조선 중기인 것이다.
0707) | 金完鎭,<訓民正音 製作의 目的>(≪省谷論叢≫3, 1972). 安秉禧,<훈민정음 사용에 관한 역사적 연구:창제로부터 19세기까지>(≪東方學志≫46·47·48,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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