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문 보급과 언문자모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국문의 보급은 한문의 국문 번역으로서의 諺解로써 이루어졌다. 불경의 언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것도 刊經都監이 이들 언해본 간행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불교 계통의 언해 이외에도 四書나≪左傳≫·≪周易≫·≪禮記≫등에 구결을 달거나 논정하게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 이미≪三綱行實圖≫·≪內訓≫등이 간행되었고, 黃山谷詩의 언해를 명하기도 하였으며≪杜詩諺解≫를 순수한 국한문혼용체로 간행하였고, 의학서로는≪救急方諺解≫·≪救急簡易方≫·≪救急易解方≫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차츰 여러 분야에 걸쳐 언해본이 간행됨으로써 국문 보급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0708)
이러한 배경 속에서 훈민정음은 그 보급의 폭을 넓혀 오다가 연산군의 집정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諺文無名狀投書事件과 관련하여 국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게 하였으며 諺文口訣의 책들을 불태우고 이어서 諺文廳을 폐지하게 하여0709) 그 결과 국문 보급이 잠시 주춤하는가 했으나 연산군 말기에는 구결을 써넣어 樂章을 찬진하게 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중종 이후로는 다시금 많은 언해본들이 간행됨으로써 국문의 보급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삼강행실도≫를 중간하고≪續三綱行實圖≫·≪東國新續三綱行實圖≫등을 이어 간행하고≪二倫行實圖≫도 간행하면서 校正廳에서는 小學·孟子·論語·大學·中庸·孝經·詩經·周易 등의 언해본을 간행하였다. 또한≪正俗諺解≫·≪朱子增損呂氏鄕約≫·≪女訓諺解≫·≪童蒙先習諺解≫·≪家禮諺解≫·≪警民篇諺解≫등도 이 시기에 간행되었다. 이렇게 보면 유교를 國是로 하여 출발했던 조선은 그 중기에 이르러 儒家의 언해본들의 계속적인 간행을 보게 된 셈이다.
불교 계통의 언해본들은 그 간행이 뜨막하다가 다시 간행되기 시작하였는 바,≪七大萬法≫·≪禪家龜鑑諺解≫·≪誡初心學人文≫·≪發心修行章≫·≪野雲自警≫·≪眞言集≫·≪勸念要錄≫등 많은 언해본들이(단,≪眞言集≫은 音譯本) 계속 간행되기는 하였으나 刊經都監의 경우와는 달리 대부분 지방의 사찰에서 간행되곤 하였다. 따라서 이들 지방 간행의 불경들에는 방언적 요소가 반영되고는 하였다.
조선 초기에 시작되었던 醫書들의 간행도 중기에는 더욱 활기를 띠었는 바,≪簡易辟瘟方諺解≫·≪牛馬羊猪染疫治療方≫·≪分門瘟疫易解方≫·≪救莣撮要≫·≪村家救急方≫등과 임진왜란 이후의≪諺解痘瘡集要≫·≪諺解胎産集要≫·≪東醫寶鑑≫·≪新刊救莣撮要≫·≪新撰辟瘟方≫·≪救莣撮要辟瘟方≫·≪辟瘟新方≫등등 많은 의서들의 간행이 이어졌다.
또한 兵書들도 간행되었는바,≪火包式諺解≫·≪新傳煮取焰硝方諺解≫·≪練兵指南≫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중간되기도 하였다.≪練兵指南≫은 변방에서의 군사교육을 위해 함흥에서 간행되었다.
農蠶書로는≪農書諺解≫·≪蠶書諺解≫등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나타난 또하나의 언해본으로 외국어 학습서들이 있다.≪老乞大諺解≫·≪朴通事諺解≫등은 중국어회화교재이며,≪老朴集覽≫·≪語錄解≫등은 중국어 어휘나 어귀 중심으로 풀이된 회화교재의 보충편이고≪譯語類解≫는 漢·韓 對譯辭典의 성격을 지닌 어휘집이다.≪捷解新語≫는 왜어회화교재이다. 이러한 외국어 학습서들의 간행은 조선 후기로 이어지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언해본은 아니지만 국문의 보급에 더욱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訓蒙字會≫·≪千字文≫·≪新增類合≫등의 한자학습서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각각의 한자에 그 뜻을 음과 함께 국문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한자와 그 뜻·음을 익히기 위해서는 먼저 국문을 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동들의 이러한 국문 해득은 결국은 국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들 한자 학습서들은 계속해서 간행되었는바, 국문의 보급과 함께 사회사적인 면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결과가 되었다. 독자층의 확대는 곧 국문 보급의 확대가 된 셈이다.
훈민정음이라는 국문의 보급에 좀더 적극적으로 기초적인 노력을 보인 방식도 있다. 이미 그 방식을 세조가 간행한≪月印釋譜≫에서 볼 수 있었다. 권두에다 훈민정음이란 문자체계에 대한 例義를 국역하여 실었다. 이것이 이른바 국역본≪訓民正音≫으로서 흔히≪월인석보≫卷頭本이라 불리는 것이다. 국한문혼용체이면서 개개의 한자에다 국문으로 음을 단 이≪월인석보≫를 읽어 이해하자면 자연히 국문인 훈민정음을 우선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월인석보≫는 종교서적이다. 좀더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문보다는 국문을 택하였던 셈이고, 이를 돕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얹었던 것이다.
≪월인석보≫에서의 이런 국문 해득 방식이 조선 중기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崔世珍의 아동용 한자학습서≪訓蒙字會≫와0710) 여러 다라니를 國·漢·梵字로 병기한≪眞言集≫이다.0711)≪훈몽자회≫는 초학자를 위한 한자학습서이기에 어린이들이 먼저 사물, 특히 鳥獸草木之名에 해당되는 한자를 알고 실물과 부합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훈몽자회≫는 故事에 치우친≪千字文≫이나 虛字가 많은≪類合≫과는 달리 物命을 나타내는 實字(全實之字)가 중심이 되었다. 범례에서 “무릇 시골이나 지방사람들 가운데, 언문을 모르는 이가 많아서 이제 諺文字母를 함께 적어 그들로 하여금 먼저 언문을 배운 다음≪훈몽자회≫를 공부하게 하면 혹시 밝게 깨우치는 데에 이로움이 있을 것이니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역시 모두 언문을 배우고 한자를 알면 비록 스승의 가르침이 없더라도 한문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서<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를 덧붙였다. 이는 최세진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일반화되었던 방식이다.≪훈민정음≫의 내용을 쉽게 재정리한 것으로 初聲終聲通用八字, 初聲獨用八字, 中聲獨用十一字, 初中聲合用作字例, 初中終聲合用作字例 및 傍點·聲調에 관한 설명이 있다. 요컨대 음절 단위 글자의 세 부분인 초·중·종성에 쓰이는 문자들을 제시하고 이들 문자들이 글자로 엮어지는 철자법 및 방점 표기를 제시하였는바, 이를 먼저 학습하고서 다음에 한자를 학습하여야(先學諺文 次學字會) 한문에 통달한 사람(通文之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夏 녀름하 又 去聲大也 又 中國曰 一
이와 같이 뜻(녀름)과 음(하)을 제시하고는 필요시에는 딴 뜻을 성조와 함께 제시한 각주를 덧붙이는 형식에서 우선 한자의 뜻과 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문을 해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諺文字母>의 내용이 최세진의 독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俗所謂反切 …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도 있거니와, 成俔의≪慵齋叢話≫에 “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二字 其字體依梵字爲之 … ”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다.≪眞言集≫(安心寺板, 1569)의 경우에는 國·漢·梵文의 순서로 다라니경을 적고 있어서 이를 읽기 위해서는 한문은 물론 국문과 범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국문자모의 용법을 설명한<諺本>과 범자를 설명한<梵本(悉曇章)>을 싣고 있다. 여기서<언문>의 내용과 목적은≪훈몽자회≫의<언문자모>와 다를 바 없다.
≪훈몽자회≫와≪진언집≫은 그 뒤에도 계속 간행되었으므로 우리의 국문인 훈민정음의 보급에 계속적으로 이바지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언문자모>또는<언본>의 내용은 그 뒤 조선 후기에≪古今釋林≫,≪新刊秘密敎≫(여기서는<諺反切>),≪佛家日用作法≫등등에도 실렸는데, 다만 약간의 내용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예컨대≪고금석림≫에 붙어 있는 부록인<訓民正音>(我 世宗大王 御製),<諺文字母>에는 방점에 대한 기술 부분이 빠져 있다. 이는 당시에 이미 성조가 우리말에서 사라졌기 때문에서였던 듯하다.
조선 중기에 국문 보급이 상당히 확대되었으리라는 사실은 국한문혼용체의 시조·가사들이 많이 발표되었음에서도 알 수 있다. 鄭澈·朴仁老·尹善道·李賢輔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