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휘 정리와 고증적 해석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특히 언해본에서 註로 단어의 뜻을 풀이하는 註釋으로 양식을 택하되 夾註로써 본문 속에다 제시하곤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어휘집의 편찬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한자학습서들인≪千字文≫·≪(新增)類合≫·≪訓蒙字會≫등에서는 개개 한자의 뜻과 음을 국문으로 표기함으로써 한자를 중심으로 한 국어어휘 능력은 신장될 수가 있었을 것이고 고사성어나 의미상 밀접한 어휘의 분류에 따라 四字類取하였기에 때로 한자어 능력도 신장될 수는 있었을 것이나, 그 자체가 어휘집은 아니었다.≪四聲通解≫는 운서이면서도 부분적으로 物名 계통의 어휘들에 대해 우리말 어휘를 대조시켜 국문으로 표기한 것도 있으나 여전히 위와 같은 성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 있어서 어휘에 관한 관심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0716) 첫째는 외국어학습을 위한 것들이요, 둘째는 한문문헌해독을 위한 것들이요, 셋째는 어휘를 비롯한 언어사용의 정확성에 대한 깨우침을 위한 노력으로 고증적 해석을 꾀한 것들이다.
외국어학습용 어휘집으로는 崔世珍의≪老朴集覽≫과 鄭瀁이 수정·증보한≪語錄解≫(1657)(이외에 南星里가 엮은≪語錄解≫등 여러 종류가 있음) 등이 있다.≪노박집람≫은 字解(單字解·累字解) 老乞大集覽 朴通事集覽으로 되었는데,≪老乞大諺解≫와≪朴通事諺解≫에서 난해한 어휘·어구를 뽑아 한문이나 국문으로 풀이하여 중국어회화를 배움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이다.≪어록해≫역시 중국어 구어의 어휘·어구들을 모아 一字類로부터 六字類까지의 속어를 자류에 따라 분류하고 한문 또는 국문으로 풀이하여 중국어학습을 돕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중국어학습서는 순수한 어휘집이라 하기보다는 주석집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중국어에 대한 관심에 이어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중국어-조선어 대역어휘집인≪譯語類解≫(1690)가 愼以行·金敬俊·金指南 등의 譯官들에 의하여 간행되게 되었다. 이 어휘집은 중국어 단어를 한자표제어로 삼고 중국어의 正音과 俗音을 달고서 그 표제어에 해당되는 우리말 풀이를 제시하였다. 표제어들은 天文·時令·氣候·地理·宮闕·官府·公式·官職·祭祀·城郭·橋梁·學校·科學 … 등등으로 뜻에 따라 분류하여 배열함으로써≪역어유해≫는 분류대역사전의 성격을 지닌 類解類 역서가 되었다. 외국어학습을 위한 대역사전은≪同文類解≫(1748),≪漢淸文鑑≫(1771),≪蒙語類解≫(1768) 등으로 이어져 간행되었는데, 모두≪역어유해≫와 마찬가지로 표제어는 漢語로 제시되었고 우리말과 해당 외국어는 모두 국문으로 표기되었다. 즉 중국 중심의 사전편찬이었던 것이다. 다만≪倭語類解≫의 경우에는 그 사전 구조는 유사하나 그 표제어가 한어가 아닌 한자어로 되어 있어서 특이하다 하겠다. 요컨대 조선 중기에 비롯되어 조선 후기에 이러한 대역사전들이 간행되었는바, 이는 당시에 그만큼 四隣外交의 필요성이 커진 데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음운학의 연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 말엽은 조선 후기의 대역어휘집 간행의 효시가 된 셈이다.
한문 위주의 문헌을 해독하기 위한 어휘정리는 四書三經 등에 구결을 달고 언해를 하도록 명했던 선조 무렵에 볼 수 있었다. 그 한 예가 16세기 말엽에 언해가 이루어지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된≪詩經諺解≫에 수록된<物名>이다. 이는 詩經의 諺解文에도 한자어로 풀이된 물명이 있어 이 물명 어휘들을 차례로 간추려 하나하나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예컨대 “며 芣부 苢이 잠 요라 (采采芣苢薄言采之)”라는 언해문에서 ‘芣苢’를 해득하기 위해서<물명>에는 이에 대하여 “芣부苢이 뵙장이ㅇ길경이”와 같이 풀이해 놓고 있다. ‘길경이’는 현대어 ‘질경이’에 해당되는데, 이는 주로 중부지방에서 쓰이는 방언형이며 ‘뵙장이’ 계통은 남부지방과 동해안지대에서 현재 흔히 쓰이는 방언형이다.≪千字文≫이나≪新增類合≫에는 이 단어가 올라 있지 않으나 아동들에게 물명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實字를 많이 포함시킨≪훈몽자회≫에는 ‘芣’와 ‘苢’에 대하여 다같이 ‘뵈이’로 나타나 있다.≪시경언해≫에서 비록<물명>으로 간추려 책머리에 붙이기는 하였으나 조선 전기의 언해서들에서 주석을 달았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물명 계통의 어휘들만 간추려 어휘집처럼 편찬했다는 점일 뿐이다. 말하자면 한문으로 된 또는 국한문혼용으로 된 문헌 해득의 편의를 위한 주석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시경언해≫의<물명>인 것이다. 또한 물명 한자어에 대하여 개개 한자의 음을 국문으로 달아 놓은 방식은 조선 초기의 언해서에서 이미 확립된 懸音國漢文混用과 같은 방식으로 經書諺解들에서도 일반화된 방식인데 이를 그대로 따른 점도 주석적 기능을 보여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東醫寶鑑≫(1613) 속의<湯液篇>도 표제화된 탕액재료에 대해 우리말로 풀이하고 있는데, 풀이된 어휘의 경우는 결국 물명인 셈이다. 예컨대 약재명 ‘車前子’에 대하여 “길경이一名뵈이”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탕액편>은 물명 계통의 어휘집으로 특수사전의 성격까지 부분적으로는 띠게 된다. 金正國의≪村家救急方≫(1538)에도<鄕名>이라 하여 本草 128종을 들고 있는데 借字와 국문으로 우리말을 달고 있다. 그러나 순순한 어휘집은 아니다. 특정한 분야의 어휘들에 대한 관심을 일찍이 姜希孟의≪衿陽雜錄≫에서 볼 수 있었다.0717) 40여 개의 곡물명의 고유어를 이두와 한글로 표기한<穀品>이 그것이다.≪금양잡록≫은≪農事直設≫·≪農家集成≫및 그의 문집≪私淑齋集≫등에 들어 있는데 곡명들은 개화기까지도 農書들에 수록되어 내려왔다.
요컨대 조선 중기에 어휘집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 문헌은≪시경언해≫의<물명>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시경의 언해문에 등장한 물명 계통의 한자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해득하게 하는 주석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동의보감≫의<탕액편>은 비록 약재명에 해당하는 우리말이나 풀이가 보이기는 하나 어휘집으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약재명은 전문어휘요, 그에 대한 우리말은 보통어휘다.
어휘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 표현에 대한 정확성을 꾀하려는 노력은 더욱더 확대되었는데, 그 예로서≪芝峰類說≫의<語言部>(권 16)를 들 수 있다. 이<어언부>는 雜說·俗諺·方言·謬誤·諧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능한 한 중국 및 한국의 고전에서 전거를 삼아 자신이 정확하다고 믿는 말을 고증하려 하였다. 잡설의 한 예를 보면,≪莊子≫에 나오는 ‘神禹’란 말은 ‘禹’라는 사람이 神스럽기 때문에 붙여진 점을≪小說≫에 ‘禹는 백가지 神이 두려워 하는
까닭에 무당은 이것을 본받아서 禹步를 한다’라고 한 것을 전거로 삼아 고증하려 하였다. 俗諺의 한 예를 보면 父·母에 해당하는 어휘인 ‘阿父’와 ‘阿㜷’를 고증하고 있는데, 아플 때의 ‘아야(阿爺)’와 놀라거나 두려울 때의 ‘어머(阿母)’를 부모를 부르는 것으로 이해하고서는 ‘阿㜷’는 이미≪李長吉傳≫과 崔致遠의<眞鑑碑序>에 나온 바 있으나 원래는 唐나라 말이라는 것이다. 方言의 한 예를 보면, 신라의 ‘尼音今’에 대하여 “대체로 신라 때에는 이가 많은 사람을 어질다”고 해서 떡을 물어 이를 시험하여 잇자국이 많은 사람을 추대해서 임금으로 삼고 ‘尼師今’이라고 불렀다는 민간어원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두시언해≫나≪훈몽자회≫의 우리 발음이 현재와는 다른 것을 보면 俗音이란 변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또한 나라마다 말이 다르지만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오랑캐나 중국이 모두 같은 것은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소리가 아닌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언어변화와 언어기호의 자의성·필연성 등도 지적한 셈이다. 끝으로 謬誤의 한 예를 보면, 아버지의 초상에 대한 ‘內憂, 外艱’과 어머니의 초상에 대한 ‘外憂, 內艱’을 혼동하여 각각 ‘外憂’와 ‘內憂’라고 잘못 쓰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지봉유설≫에는 또한<文字部>(권 7)가 있는데, 文義·字義·字音을 다루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한문·한자의 정확한 뜻을 고증·해설하거나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李睟光의 고증적 서술은 자연히 중국 문헌에 많이 의존하면서 중국 지향적인 해석이 많기는 하였으나 방언 즉 우리말에 대한 고증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것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고증적 서술은 또한 자연히 어원을 밝히려 한 성격을 지니게도 하였다. 이러한 고증적인 태도는 조선 후기로 넘어와 申景濬의≪華音方言字義解≫라든가 李義鳳의≪東韓譯語≫, 丁若鏞의≪雅言覺非≫(및 雅言指暇) 등등으로 이어졌고 개화기에도 계속되었다. 어문에 관한 좀더 정확한 이해와 사용을 위한 노력은 南九萬의 손자인 南克寬의 문집≪夢藝集≫에서도 볼 수 있다. 남극관은 조선 중기와 조선 후기의 교체기에 살다가 요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漫錄의 성격을 띤 문집 부분인<謝施子>에 어문에 관한 기술들이 들어 있다. 어휘(지명, 성명 등)의 연원과 관련된 언급(智異山, 木覓山, 金姓 등), 훈민정음의 字體와 鄭麟趾 後序와 관련된 발성에 관한 논급, 성조와 한자음에 관련된 언급 이외에 언어변화에 관련된 당시의 발음에 대한 실증적 기술 등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언어변화와 관련하여 고유어 중심의 당시의 발음 현실을 기술한 경우로는 남극관의 기술이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그 내용은 예컨대≪高麗史≫에 ‘高伊(猫)’라 하던 것이 ‘괴’의 일음절(一字)로 변하였고 ‘가히(大)’도 ‘개’로 변하였는가 하면, 이전에 쓰이던 ‘키(大) 효근(小), 미르(龍) 재(성 재안)’ 들은 당시에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던가 하는 지적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변화를 당시의 발음에 따라 언급한 것을 역시 좀더 정확한 어문의 이해와 사용에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남극관이 지적한 이러한 언어변화 가운데는 그 변화의 시기가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언어변화, 특히 고유어 중심의 음운변화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지적한 것은 1세기 좀 지나서 柳僖의≪諺文志≫(1824)라든가 石帆의≪諺音捷考≫(1846)에 이르러서야 다시 볼 수가 있다.
<李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