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사학과 사학사상의 특징
16∼17세기의 역사학에서는 새로이 등장하였던 사림들의 역사의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역사의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 초기 이래의 도덕과 교훈을 위한 유교적 역사관을 그대로 이으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한 가치평가와 도학적 역사관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또한 朱子의 正統論과 綱目論을 수용하여 역사서술에 이용하였다.
조선 전기는 관료 중심의 관찬사서가 주조를 이루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통치제도가 새로 정비되면서 역사학은 국가의 관료에 의해 국가적인 필요에서 편찬되었다. 국초의 權近에 의한≪東國史略≫(일명≪三國史略≫),≪高麗史≫와≪高麗史節要≫의 편찬,≪東國通鑑≫의 편찬, 그리고 전국적인 지리서인≪世宗實錄地理志≫와≪東國輿地勝覽≫의 편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비교적 자료에 충실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편찬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한 현실적인 규범을 따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역사학은 15세기와는 달리 관료에 의한 편찬보다는 개인학자들의 관심에 의해 연구되었다. 특히 사림 중심의 私撰史書는 주로 小學敎育을 위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현실적 실용성이 강조되었다. 역사지리학도 마찬가지로 외침이라는 국난을 당하여 조국의 영토와 그 수호에 관한 현실적 의식에서 출발하였으며 악부체 또한 사림들의 유흥을 위한 시가의 소재로서 역사적 자료가 활용되었다. 야사류나 일기의 서술도 사림들의 현실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역사학이라 하면 으레 중국의 역사학을 지칭하여 민족적 자의식이 빈약하였다. 아직 우리 독자적인 민족적인 개성이나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도도히 흐르는 중국 중심적 역사학에서 우리 나라의 것도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역사학이 연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통사를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은 이 시기에 싹트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역사학에서 개인학자들이 개인적 관심에서 연구한 결과는 형식이 다양하였지만 역사의식에서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였는가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이는 이념이 성리학으로 굳어져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생각하여야 문제이다. 그러나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인 역사지리학은 사실의 眞否를 밝히려는 분야로서 도덕적인 평가가 크게 배제된 점에서 특이한 새로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지리학적 연구는 조선 전기에 고구려의 영역을 한반도 안으로 설정함을 수정하여 만주지역에 있었음을 밝혔다.
요컨대 조선 중기 역사학은 조선 전기의 역사학을 바탕으로 18세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시기였다.0750)
<鄭求福>
0750) | 조선 후기 역사학에 대해서는 鄭求福,<朝鮮後期의 歷史意識>(≪韓國思想史大系≫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4)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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